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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다은 Apr 06. 2020

뜻 밖의 다행

고를 수 있다면 뜻 안의 운보다는 뜻 밖의 운을 발견하며 살아보고 싶다.

당연하게 쓰는 말도 뜻을 한 번 찾아보려는 요즘이다. 뜻을 제대로 알고 나면 그 말을 사용하는 때나 기분이 조금 달라지기도 한다. 나는 글을 쓰든 말을 하든 '너무, 생각한다, 다행이다'를  자주 쓴다. 이번 주만 해도 복구하지 못할 줄 알았던 외장하드를 살려냈을 때, 갑자기 재부팅된 컴퓨터에서 자동 저장된 한글 파일을 발견했을 때, 정면으로 떨어트린 후 식겁하고 집어 든 휴대폰 액정이 멀쩡할 때 “휴. 다행이다. 진짜 다행이다.”를 남발했다. 이쯤 되니 ‘다행이다’라는 말도 정확한 뜻이 궁금해 찾아보았다. ‘뜻밖에 일이 잘되어 운이 좋다’라는 의미가 있다. 가만 보면 다행을 참 습관처럼 찾았다.


틀리게 사용한 것은 아니지만 '다행이다'의 의미를 찾아 읽어보고는 그 말을 어떻게 사용하면 좋을지 처음으로 고민해보게 되었다. 뜻 가운데 있는 ‘운이 좋다’는 말이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다. 물론 외장하드와 작업한 파일과 휴대폰을 잃지 않은 것은 정말 감사한 일이지만 딱히 운이 좋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운이 좋다는 말을 워낙 사용하지 않는데, 손꼽히는 순간에 아껴둔 것을 꺼내듯 말하고 싶어서다.  


게다가 다행이라는 건 그냥 운이 좋은 것도 아니고 ‘뜻밖에 일이 잘되어 운이 좋은 것이다. 내가 어떤 뜻이나 생각에 얼마큼의 기대를 걸고 있는지에 따라 이 말을 사용하는 자리가 달라질 수 있다는 말이다. 아주 주관적이고 개인적인 말인 것이다. 이적의 노래 ‘다행이다’는 그런 의미에서 사람들의 마음을 울린다. 시작부터 담담하게 읊는 다행인 순간들은 그의 가사를 끝까지 귀 기울여 듣고 싶게 만든다.    

 


그대를 만나고

그대의 머릿결을 만질 수가 있어서

그대를 만나고

그대와 마주 보며 숨을 쉴 수 있어서

그대를 안고서

힘이 들면 눈물 흘릴 수가 있어서   

다행이다

그대라는 아름다운 세상이 여기 있어 줘서

     

거친 바람 속에도 젖은 지붕 밑에도

홀로 내팽개쳐져 있지 않다는 게

지친 하루살이와 고된 살아남기가

행여 무의미한 일이 아니라는 게

언제나 나의 곁을 지켜주던

그대라는 놀라운 사람 때문이라는 거

    

그대를 만나고

그대와 나눠 먹을 밥을 지을 수 있어서

그대를 만나고

그대의 저린 손을 잡아 줄 수 있어서

그대를 안고서

되지 않는 위로라도 할 수 있어서

다행이다

그대라는 아름다운 세상이 여기 있어 줘서     


그의 가사에서는 잔잔한 햇살이나 아늑한 방구석 같은 걸 찾아볼 수 없다. 그는 때로 거친 바람이 부는 젖은 지붕 밑에 있는, 지치고 고된 하루를 살아가는 사람이다. 누구나 인정할 만큼 특별한 운을 쥔 사람은 아니어 보인다.

그러나 그는 지친 하루에 홀로 있지 않게 해주는 당신이 있는 것, 그로 인해 고되게 살아남는 일이 무의미하지 않을 수 있는 것에서 자신의 운을 발견하는 사람이다. 사람이 힘이 들지 않고, 손이 저리지 않고, 그래서 애초에 위로도 필요 없는 상황에 기대를 걸기는 참 쉽다. 반면 기대처럼 되지 않을 때 자신의 뜻 밖에 서 있는 사람과 의미와 고마움을 바라보는 시야를 가지기는 얼마나 어려운지. 그의 노래를 듣다 보면 내 좁은 뜻 밖이어야 더 높고 넓은 차원의 운들을 만나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며칠 전, 카페에서 일하다 말고 휴대폰 메모장을 켜서 몇 문장을 적었다. ‘다행이다’란 말에 대한 고찰은 사실 이 문장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이런 내용이다.     


‘벌이의 넉넉함과 성실한 태도. 유년 시절 부모에게 바란 것은 전자이고, 실제 보고 자란 것은 후자이다. 그 사실이 부쩍 다행이다.’     


겪지 않을 수 있는 일을 겪으면 마음과 몸이 소모되지만, 그만큼을 채우는 어떤 것을 만나 사람은 성숙한다. 실보다 득을 크게 느끼다 보면 어느새 채우고도 넘친 것들로 내면이 더욱더 단단해진다. 그런 운을 조금씩 발견하게 된다. 부쩍 내가 운 좋은 사람인 이유다.


나의 다행은 누구를, 무엇을 향하고 있나. 나는 앞으로 어떤 운을 발견할 수 있을까.  ‘다행이다’를 자동재생처럼 뱉을 때는 느낄 수 없던 고마움이나 소중함이 이제는 느껴진다. 고를 수 있다면 뜻 안의 운보다는 뜻 밖의 운을 발견하며 살아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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