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은 '휴식'에 대해 묻고 있었다. 정확히는 '너의 너튜브 생활은 안녕한지'에 대해 묻고 있었다. '이걸 못 보게 하는 방법은 없나?'라고 혼자 중얼거렸다. '앱을 제거하면 되지.'라고 머릿속으로 혼자 답했다. 물론 나도 그럴 용기는 없다.
어떤 날은 열심히 뭔가를 하고 나면 잠시 쉴 요량으로 핸드폰을 손에 쥔다. 그걸로 끝. 난 끝이다. 난 꼭 너튜브를 켜게 되고, 영상은 다른 영상을 부른다. 어떨 땐 자기 계발 영상들을 줄지어 본다. -이런 영상들은 꽤 의미 있게 느껴진다. 이 함정에서 벗어나야 한다. 실천하지 않는 영상 과다 시청은 그냥 시간 낭비다.- 연예인들의 가십에 빠지기도 하고, 남자 연예인의 입덕 영상들을 연달아 볼 때도 있다. 엄마 미소로 고양이나 강아지, 외국 아기들의 영상을 보기도 한다. 선거철엔 정치 관련 영상도 보고, 일명 국뽕 영상을 볼 때도 있다. 목욕할 때 좋은 음악, 운동할 때 좋은 음악, 아침에 듣기 좋은 음악 리스트들을 찾아 듣기도 한다. 어떨 땐 영화 추천 영상을 보다가 야한 영상으로 빠지기도 한다. 고로, 나는 너튜브에서 너무 바쁘다.
남편도 다르지 않은 모양이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어떤 날은 일하는 시간보다 유튜브 보는 시간이 더 많다'고 고백했다. '자기가 실망할지도 모르는데 솔직하게 말하는 건 변하고 싶어서'라고도 말했다. 열심히 일하는 줄로만 알았는데 막상 듣고 보니 기분이 좋진 않았다. 남편은 퇴직 후 작은 오피스텔을 구해 혼자 일하고 있다. 일을 핑계로 주말에 나가기도 하고, 밤 늦게 돌아오기도 했다. 혼자 아이를 돌보는 게 벅찰 때도 있었다. 남편의 제2의 인생을 위해 나름 투자하고 있다고 믿었는데 믿을 놈이 못됐다. 고 3 여름 방학에 독서실에 간다고 뻥치고 친구들과 놀고 롯데리아 갔다가 오락실 노래방에서 두 시간을 연달아 부르고 온 걸 들켰던 날, 엄마의 기분이 이런 게 아니었을까 싶었다.
너도 비슷한 처지 아니냐, 싶겠지만 그와 나는 명백히 다르다. 나는 '휴직'을 한 것이고, 그는 '퇴직'을 한 것이다. 말하자면 나와 그는 모두 바다에서 헤엄치고 있다. 돌아갈 배가 있는 나에게 헤엄은 물놀이다. 돌아갈 배를 보내버린 그에게 헤엄은 생존이다. 남들이 보기엔 똑같아 보여도 그는 튜브에 몸을 맡기고 노닥거리며 유유자적하는 나와는 다를 수 밖에 없다. (퇴로를 끊지 못해서 나의 발전은 더딘 면이 있지만, 이건 다음에 논하기로 하자.)
일단 그는 열심히 일을 하고 나면, 잠시 쉬어도 된다는 자기 합리화를 하면서 폰을 드는 것으로 이 문제가 시작된다고 했다. 아직도 직장 생활의 패턴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 같다고도 했다. 예전에도 그렇게 일의 중간중간 너튜브를 봤는데, 그땐 그 흐름을 강제로 끊어내는 무엇이 존재했다고 했다. 다른 업무가 시작된다거나, 회의 시간이 됐다거나, 누가 말을 건다거나, 상사의 눈치를 느낀다거나. 하지만 온전한 그만의 공간에서 이젠 아무도 그를 방해하지도 그를 일으키지 않았다. 그러면 그는 '보고 또 보는' 사람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나는 우리가 너튜브 중독임을 먼저 분명히 했다. 텔레비전이 없으면 무슨 소용인가. 우리 집엔 텔레비전이 없으므로 우리는 핸드폰을 텔레비전 삼아 살았다. '필요해서 보는 거잖아.' 혹은 '집안일하면서 잠깐 보는 거잖아.' 상대에게 너튜브 보는 일을 타박하면 이런 대답이 날카롭게 꽂혔다. 일과 일 사이뿐 아니라, 설거지하는 시간, 아이의 그네를 밀어주는 시간, 샤워 시간, 자기 전까지 우리는 너튜브와 함께 했다. 잠시의 공백도 용납하지 못하겠다는 듯 영상들을 찾아 헤맸다. 가끔 나름 유용한 영상들을 볼 때도 있었다. 그땐 너튜브가 자신에게 도움이 되는 것임을 상대에게 과시했다. 나는 영상 '따위'를 보는 게 아니라 자기 계발 중임을 은근히 드러냈다. 설거지를 하거나 빨래를 갤 때는 예능이나 연예인 가십 등을 봤다. 이때에도 어김없이 자신은 동시에 집안일을 하고 있음을 상대에게 강조했다. 너무 피곤하다며 상대에게 육아를 맡기고 침대에 누워서도 심심함을 못 이기고 너튜브를 켰다. 음소거를 해두고 소리 없이도 볼만한 영상들을 찾아 봤다. 상대가 안방 문 앞을 지나가기만 해도 깜짝깜짝 놀라며 폰을 이불 속으로 숨겼다. 우리는 가끔 서로에게 들켰다. 그럴 때면 상대가 한심해 보였다. 스스로가 부끄러웠다.
나는 남편에게 잠시의 공백도 용서하지 않는 생활 습관을 고쳐보자고 제안했다. 아무런 배경 음악이나 영상 없이 설거지하기, 샤워하기, 빨래 개기 등을 하는 것에서부터 탈출을 시도해보자고 설득했다. 물론 나도 함께 하기로 약속했다. 조금 더 조용히 살아보면 더 생각할 거리가 늘지 않겠느냐는 게 나의 생각이었다. 우린 조용히 생각할 시간에 너무 너튜브를 보는 경향이 있다는 말에 남편도 동의했다.
사실 사람은 '사색'할 때 새로운 생각과 삶의 변화가 찾아온다. '사색'은 일상에서 시작할 수 있다. 진지하게 자리 잡고 앉아 '명상'까지 할 필요도 없다. 설거지를 하면서, 빨래를 개면서, 샤워를 하면서 하루를 계획하고 반성할 수 있다. '오늘 그 말은 괜히 했군.', '내일 출근하면 그 일부터 해결하는 게 좋겠어.', '화분에 물을 좀 줘야겠네.', '내일은 엄마하고 통화나 한 번 해봐야겠네.'와 같은 생각들을 할 수 있다. 현대인들은 조금 더 조용히 살 필요가 있다. 가만히 한 가지의 일만 하다 보면 왠지 시간을 낭비하는 것만 같은 착각이 든다. 하지만 뭔가가 필요해서 고른 그 영상들은 분명 당신을 산만하게 만든다. 어떤 생각을 할 여유도 용납하지 않는다. 고요 속에 당신을 내버려 두는 것이 더 현명하다.
다음 날 새벽 5시, 나는 모닝 루틴을 하다 새로운 목록을 작성해보았다. 제목은 '쉬면서, 일과 일 사이에 하기 좋은 소일거리들'이다. 새벽은 나에게 항상 새로운 영감을 가져다준다. 전날 밤, 대화 중에는 생각하지 못했던 새로운 아이디어들이 떠올랐다.
나는 남편에게 아침 식사 전 이 목록을 내밀었다.
"이걸 책상 위에 붙여 놓는 거야. 휴식이 필요할 때 이 중에서 마음에 드는 일을 하는 거지. 어때? 자기에게 맞게 고쳐 써보면 좋을 것 같아."
이 목록엔 잡다하게 평소 시간이 나면 하겠다며 미뤄왔던 소소한 일들이 나열되어 있었다.
어항 관리하기, 10분 눈감고 명상하기, 가계부 정리하기, 피아노 연습하기, 고양이 간식 챙겨주기, 차 내려 마시기, 손발톱 깎기, 창문 열어 환기하기, 소원했던 친구에게 카톡으로 안부 묻기, 화분에 물 주기, 요가 스트레칭, 마스크팩 붙이고 누워 있기.
"이거 찍어 가도 돼?" 시큰둥할 줄 알았는데 의외였다. 푸시-업 하기와 물 마시기를 하면 좋겠다고 의견을 내기까지 했다. 나름 고민이 많았었나 보다. 남편은 자신만의 목록을 만들어 나갈 것이다.
너무 오래전에 스치듯 들어 출처와 명칭들까지 정확하게 기억하진 못하지만, 휴식을 하게 될 때면 자주 떠올리는 내용이 있어 적어본다.
'쉼'은 '아무것도 하지 않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단지 이제껏 하던 일과 다른 일을 하는 것만으로도 우리의 뇌는 이것을 '쉼'으로 인식한다. 뇌의 전혀 다른 부분이 활동하게 되기 때문이다. 나는 이 말을 학창 시절 공부할 때 많이 응용했었다. 영어 단어를 외우다가 잠시 연습장에 그림을 그리는 것. 수학 문제를 풀다가 친구에게 간단한 편지를 쓰는 것만으로도 쉼이 될 수 있음을 이미 잘 알고 있다. '잘 쉬어야 한다'는 논리에 이끌려 자신을 굳이 넷플릭스나 너튜브, 텔레비전 앞에 눕혀 둘 필요는 없다는 이야기다.
이 글을 쓰다가 '고양이에게 간식 주기'를 선택해 잠시 쉬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고양이와 눈을 마주치며 간식을 짜 먹였다. 내 손등에 머리를 부딪고 애옹거리는 녀석과의 시간이 만족스러웠다. 잘 쉴 수 있는 당신만의 목록을 만들어보기를 권한다. 그리고 목록 중 좋은 건 서로 공유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