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가 내게 전한 위로

내가 참 좋아하는 <쇼코의 미소>의 작가의 말.

by 캐롤

나는 좋은 소설을 낼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전날 이래저래 짜둔 내용을 글로 옮겨 담다가 알았다. 내용이 너무 우울해서 나도 읽다가 우울해졌다. 이렇게 우울하기만 한 글을 누가 읽나. 나는 왜 이딴 우울한 이야기를 쓰고 있나. 내 정신세계에 무슨 문제가 있나.

혼자서 이야기를 구상할 때는 인물에 빙의해 몇 번 울컥하기도 했었다. 그게 좋은 징조라고 믿었다. 막상 글로 옮겨 쓰면서는 오히려 담담해졌다. 아까의 울컥함은 글로 옮기지 못했다. 일단 맘에 안 들더라도 초고를 완성해내고 싶었다. 꾸역꾸역 끝까지 이야기를 적어냈다. 마음과 시간을 내어 글을 썼는데 마음에 차지 않았다. 막상 다 쓰고 나니, 별 내용도 아닌 듯 보였다. 처음부터 이렇게 시간을 들여 쓸만한 이야기이긴 했는지 의심스러웠다.

일어나니 어제 써 둔 글부터 떠올랐다. 오늘은 아무것도 쓰고 싶지 않았다. 하루를 꼬박 들여 최은영의 단편집 <<쇼코의 미소>>를 읽었다. 몇 번을 읽었는데도 눈물이 나던 부분에선 또 눈물이 났다. 최은영의 소설들은 내가 쓰고 싶은 소설을 닮았다. 내가 어떤 소설을 쓰고 싶은지 최은영의 소설을 읽으면 알 수 있었다. <쇼코의 미소>, <신짜오, 신짜오>, <언니, 나의 작은, 순애 언니>를 읽고 가슴이 답답했다. 나는 저런 소설을 절대 써낼 수 없을 것만 같아 슬펐다. 도저히 불가능하다. 소설이 너무 좋아서 마음이 아팠다. 이룰 수 없는 꿈을 보고 있는 느낌이었다. 이쯤에서 그만두고 소설 쓰기를 내려놓는 게 순리에 맞다 싶었다.

마지막 소설 <비밀>까지 읽고 '해설'과 '작가의 말'을 읽었다. 소설은 여러 번 읽었지만 '작가의 말'까지 읽은 건 두 번째였다. 책을 처음 샀을 읽었으니 처음 읽는 것과 진배없었다.

서른 살 여름, 종로 반디앤루니스 한국소설 코너에 서 있던 내 모습을 기억한다. 나는 안 되는 걸까, 한참을 서서 움직이지 못하던 내 모습을. 글을 쓰고 책을 내는 삶은 멀리 있었고, 점점 더 멀어지는 중이었다. 이 년간 여러 공모전에 소설을 투고했지만 당선은커녕 심사평에서도 거론되지 못했다. 그해 봄 애써서 썼던 <쇼코의 미소>도 한 공모전 예심에서 미끄러졌다.


내가 비슷한 실패의 과정을 겪고 있다고 해서 최은영 같은 작가가 될 수 있다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믿기엔 나도 늙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비슷한 실패를 하고, 그중 소수만이 꿈을 이룬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한 번의 실패로 무너지거나, 꾸준한 실패를 하다 포기한다.

그럼에도 이 말이 참 위로가 되었다. 머리로 아는 것과 마음으로 느끼는 것은 항상 다른 법이니까. 최은영도 '나는 안 되는 걸까'라고 느꼈었구나. 최은영도 2년동안 투고했지만 아무런 반응을 얻지 못했었구나. 내가 좋아하는 <쇼코의 미소>도 '젊은 작가상' 수상 전엔 예심에도 붙지 못하기도 했구나. 벌써 <쇼코의 미소>를 써 놓았음에도 최은영이 이때 소설 쓰기를 포기했다면 어땠을까. <쇼코의 미소>는 최은영의 컴퓨터에서 썩어갔을지도 모른다. 다행히 최은영은 <쇼코의 미소>로 그 해 겨울 등단했다. 그녀의 소설들을 애정 하는 독자로서 그녀의 끈기에 감사한다.


오늘은 소설 대신 최은영의 '작가의 말'을 필사했다. 손으로 꾹꾹 눌러 담아 적었다. 내 단편집을 내며 '작가의 말'을 적는 그날을 머릿속으로 그렸다. '작가의 말'을 필사하고 있을 줄이야. 어이가 없었지만, 좋았다. 꼭 내가 단편집을 내고 '작가의 말'을 적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그중 몇 마디는 그 자체로 '미래의 나'가 쓴 듯 해 울컥울컥 했다. 다른 작가의 '작가의 말'을 필사하면서 울다니. 하지만, 나는 이 시간이 진정으로 좋았다.


가끔 글쓰기에 해이해지고 게을러질 때면 그때 그렇게 울었던 나의 마음을 떠올렸다. 이생에서 진실로 하고 싶었던 일은 이것뿐이었다. 망상이고 환상일지도 모르지만 나는 글을 쓰는 사람으로 살고 싶었다.
등단 이후, 오래 짝사랑해온 사람과 연애하는 심정으로 글을 썼다. 한 문장, 한 단락, 한 작품을 완성할 때마다 그 자체로 행복할 수 있었다. 몇 시간이고 책상에 앉아 고작 몇 줄을 쓰는 그 지지부진한 시간들이 나를 살아 있는 사람으로 살게 했다. 몰두해서 글을 쓸 때만 치유되는 부분이 있다.


포기하기엔 아직 너무 일렀다. 생각해보면 포기한다고 마땅히 할 다른 것도 없었다. 그저 유튜브를 좀 더 보고, 다른 취미생활을 더 하겠지. 그럴 바에는 그냥 써보는 것이다. 장강명이 강의에서 '예전에 나도 작가를 꿈꿨었다.'말하는 사람들을 사석에서 자주 만난다고 말한 것을 자주 떠올린다. 10년 뒤에도, 20년 뒤에도 후회할 거라면 지금 해보자고, 후회 없이 해보자고 나를 다잡아 본다. 적어도 아직은 너무 이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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