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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캐롤 Aug 16. 2022

21. 나는 기꺼이 '이 아이'의 엄마가 되겠다.

  딸의 위탁이 결정되고, 난임병원에 들른 적이 있었다. 정말 몇 년동안 마르고 닳도록 다녔던 곳인데, 이렇게 마음이 달라질 수가 있을까. 딸이 만들어 낸 변화였다. 아기를 카시트에 태우고 병원 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남편과 아이를 두고 나 혼자 병원으로 들어갔다.

  그동안 담당하던 의사 선생님께 딸을 실제로 보여드리고 싶었지만 참았다. 난임병원에서는 다들 아기를 데려오지 않는다. 첫째가 있고 둘째를 낳기 위해 병원을 다니는 경우라도 가능하다면 아이를 다른 사람에게 맡기고 온다. 다른 사람들을 위한 배려다. 난임 병원에는 자신의 시술 상황에 따라 예민한 사람들이 존재하기 마련이다. 시술을 준비하는 과정에 있는 경우라면 희망이 있어 조금은 여유로운 태도를 보일 수 있지만, 모두가 그런 건 아니다. 방금 진료실에서 시술 실패 결과를 듣고 나왔거나, 시술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진단을 받은 사람들도 그 사이 섞여 있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를 위해 조심한다. 시술에 성공했다고 웃으며 진료실을 나오는 커플은 거의 없다. 그런 기쁨의 순간에도 진료실을 나올 땐 나름 표정 관리를 한다. 시술 성공의 증거물인 초음파 사진은 미리 가방에 숨긴다. 그걸 나풀나풀 들고 다니는 사람은 무례한 사람 취급을 받기 쉽다. 난임 카페에서 그런 사람들에 대한 불편함을 담은 글을 자주 보았다. 나야 시술에 성공해본 적이 없으니 그래본 적은 없지만 말이다. 하하하. 어쨌든 내가 임신에 성공을 한 것은 아니지만, 아이나 내 이마에 '입양'이라고 박아 넣지 않는 이상 아기를 안고 병원에 들어가면 같은 불쾌함을 느끼는 사람들이 분명 있을 터였다.

  나는 그동안 세 명의 의사를 거쳤는데, 그 중 마지막 의사 선생님은 그동안 내게 의미가 깊었다. 그분은 나와 나이 차이가 몇 나지 않는 젊은 여자 선생님이셨다. 선생님의 책장 위에 붙어있던 내 난임 검사 관련 포스트잇을 보았을 때의 감사함은 평생 잊지 못할 거다. 선생님은 그 전 의사들이 발견하지 못했던 내 난임의 문제점을 찾아내셨다. 내가 진료실에서 '포스트잇에 제 이름이 있네요'라고 말했을 때 쑥쓰러워하시면서 ‘흔하지 않은 케이스라 좀 공부해봐야 할 것 같아서요.’라고 답하시던 선생님. 병원에서 가장 유명한 의사는 아니었지만, 내겐 최고의 의사선생님이셨다. 그러다보니, 나는 선생님에게 시술 뿐 아니라, 정서적으로도 의지를 많이 했었다.

  분명히 기쁜 마음으로 병원에 들어왔었는데, 진료실에 들어가 선생님의 얼굴을 보자 울음이 터져 나왔다. 나는 이 진료실에서 몇 번이나 이렇게 울었을까. 그 동안 노력했던 시간과 괴로웠던 순간, 기대와 실망을 반복했던 날들이 생각나 감정이 복잡해졌다.

 입양 계획을 말씀드리자, 너무 빠른 결정이 아니냐며 아쉬워해 주셨다. 같은 케이스로 얼마전 출산까지 한 산모가 있다고, 아직은 젊어서 조금 더 해 볼 수 있다고, 자신이 더 노력할 수 있으니 마음이 바뀌면 꼭 오라고도 하셨다.

  이미 딸을 키우기 시작한 내 귀엔 그런 말씀이 더이상 의미 있게 들리지 않았다. 마냥 남일처럼 들으며 웃어보이는 나를 빤히 보시더니 그제서야 ‘입양 축하드려요.’라고 말하셨다. 몇 가지의 주의사항을 더 듣고 돌아나오던 내게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혹시 언제든 임신한 걸 알게 되면, 꼭 바로 오셔야 해요. 아시죠?”

  선생님께 난 실패한 환자였을까, 포기한 환자였을까.

  그래도 몇 년을 감정을 나누며 지냈던 관계였기 때문에, 난 선생님과 사이에 그래도 조금은 마음이라는 게 오고 갔다고 믿는다. 선생님께 내가 '엄마이기를 포기하지 않은 여자'로 기억되었으면 좋겠다. 선생님을 통해 엄마가 되지는 못했지만, 그동안 함께 해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하다고 전해드리고 돌아올 수 있어 기뻤다.

  납부를 기다리며 홀에 앉아 주변을 돌아보았다. 익숙한 간호사들이 목인사를 하며 지나갔다. 대기석에 앉은 여자들 중에도 몇은 눈에 익었다. 다시는 이 곳에 올 일이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자, 갑자기 모든 공간에 슬로우모션이 걸린 것처럼 느껴졌다. 내 인생에서 가장 답답했던 순간이 아름다운 추억처럼 느껴졌다. 이렇게 사람이 간사하다.

  난 그날 이후로 다시는 그곳에 가지 않았다. 일부러 피해 다니는 건 아니다. 평소 다니던 지역이 아니라서 근처를 스칠 일조차 없었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사람들과의 대화에서 난임시절을 이야기하곤 한다. 그 때를 이야기하지 않고서는 나라는 사람을 제대로 설명할 수 없을 때가 여전히 많다.

  난임기간은 꼭 터널과 같았다. 길고 어두운 터널. 하지만 그 터널에도 끝은 있다. 적어도 여자 나이 마흔이 넘어서면 더이상 시술이 불가능해지는 시기가 오게 마련이니까. 그 사이 성공을 하든, 포기를 하든 각자 답은 있게 마련이다.

  내 터널의 끝엔 딸이 서 있었다. 엉뚱한 곳에서 열심히 노력하고 있던 내게 딸은 이렇게 말해주었다.

  “엄마, 난 거기가 아니라, 처음부터 여기 서 있었어.”

  나는 엉뚱한 곳에서 긴 시간 헤맨 셈이 되었다. 하지만 안다. 우리 부부는 그 긴 터널을 지나야만 했다. 딸을 만날 새로운 길은 그 터널의 끝에 있었으니까.

  가끔 인생은 그럴 때가 있다. 처음부터 지름길로 가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다. 모든 과정을 거치고, 괴로움을 견뎌야만 다음 문이 열리는 법이다. 마침맞은 순간에 그 터널에서 나왔기에 다른 아이가 아닌 내딸을 안을 수 있었다고 생각해보면 인생은 참 재미있다. 만약 시간을 돌려 과거로 돌아간다고 해도, 내가 임신으로 아기를 얻을 수 없다는 걸 이미 알게 된다고 해도, 나는 기꺼이 다시 그 터널로 들어가 그 시간들을 견뎌내고 '이 아이'의 엄마가 되는 일을 택하겠다.


브런치북 2권이 있습니다. 시간이 되신다면 이어읽어주세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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