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행이야. 이 정도면 럭키야!

순간의 나쁜 상황에서 자신을 살리는 말

by 캐롤

**이전 글이 실수로 삭제되어, 기억을 더듬어 다시 적은 글입니다.


이른 새벽이었다. 세수를 마치고 화장대에 앉았다. 얼굴에 이것저것을 정성스레 챙겨 발랐다. 남편은 이미 출근했다. 아이는 깨려면 아직 멀었다. 여유로운 아침 시간이었다. 거실에서 '쿵'하는 소리가 들렸다. 무슨 소리인지 알 수 없었다. 튕기듯 뛰쳐나갔다.

아일랜드 식탁 위 어항이 바닥으로 떨어져 있었다. 플라스틱 어항이라 다행히 깨지지 않은 듯 보였다. 온 사방엔 물이고, 그 옆으로 고양이 '이지'가 발바닥에 묻은 물을 귀찮은 듯 털어내고 있었다.

어항 속에는 베타 종인 물고기 '배타미' 한 마리가 혼자 살고 있었다. 이지는 처음 물고기를 들여왔을 땐 본척만척했었다. 요 근래 어항을 아일랜드 식탁으로 옮기고 나서 관심이 부쩍 늘었다. 괜히 어항 벽에 냥냥 펀치를 날리기도 하고, 한참 동안 쳐다보다 어항의 뒤로 가 앉기도 했다. 오늘도 그러다 어항을 식탁 아래로 밀어낸 모양이다. 일단 물고기를 찾아야 했다. 물 밖에서 오래 견딜 리 없었다.

"이지, 배타미 어쨌어? 먹었어? 어딨어?"


입으로는 다급하게 소리를 치면서 눈으로는 부엌 바닥을 샅샅이 훑었다. 온 바닥을 다 뒤져도 물고기는 보이지 않았다. 진짜 고양이가 먹었나? 이지의 입가를 유심히 한 번 보고는 다시 부엌을 뒤졌다. 설마 한 입에 꿀꺽 하기야 했을까. 드디어 찾았다. 식탁 의자 방석 위에서 세계를 잃고 헤매고 있었다. 어항에 급하게 물을 붓고 넣었다. 분명 매우 놀랐을 텐데도 당장 보기에는 큰 문제가 없어 보였다. 환수를 위해 미리 받아둔 물이 있어 다행이었다.

물고기를 구해놓고 나니 정신이 차려졌다. 이제야 부엌이 눈에 들어왔다. 2리터가 넘는 물이 쏟아졌다. 걸레에 세탁하려던 수건까지 몽땅 동원해 부엌을 닦았다. 이게 아침 댓바람부터 무슨 난리인가. 바닥을 닦는데도 어이가 없었다. 코웃음이 났다. 대충 정리를 하고 보니, 어항에 어딘가 깨졌는지 물이 계속 샌다. 역시 새로 사야 할 모양이다. 물고기를 유리컵으로 옮겨 담았다. 물고기 입장에선 전쟁통이 따로 없겠다. 살던 곳에 폭격을 맞고 난민촌에 들어앉은 셈이다.


'배타미, 조금만 참아. 미안해, 곧 괜찮아질 거야.'


유리컵 속 배타미를 살펴보면서 진짜 마음속으로 이렇게 말했다. 고양이를 키우면서, 물고기를 기르겠다고 마음먹은 걸 처음으로 반성했다. 고양이와 사는 건 물고기에겐 너무 가혹한 일이 아닐까. 그동안의 냥냥펀치가 진짜 무서웠으려나. 살면서 물고기에게 미안해할 일이 생길 줄은 몰랐다. 고양이와 물고기의 공존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봐야 할 듯싶다.


대충 상황은 마무리되었다. 다시 화장대 앞에 앉았다. 거울을 보니 얼굴이 가관이었다. 바르다 만 선크림이 여기저기 번져 있었다. 어이가 없어 웃음이 났다. 남편에게 다다닥 카톡을 날렸다.


이지 어항 박살냄!

부엌 물바다 대박!


진짜? 물고기는 괜찮아?


'응, 배타미는 괜찮아'라고 답하려는 순간, 머릿속에 수많은 생각이 스쳐갔다. 기왕에 고양이가 깨 먹을 어항이었다면, 지금 이 순간이라 너무 다행이었다. 아이가 깬 후였다면 날뛰는 아이를 신경 쓰며 사태를 마무리하느라 몇 배는 더 애먹었을 것이다. 출근 직전이었다면, 무조건 지각이었을 테다. 출근 후였다면 분명 배타미는 죽었을 거고.

또 플라스틱 어항이라 훨씬 수월했다. 깨진 유리 조각 사이를 누비며 물고기를 찾는 일은 더 어려웠을 거다. 고양이가 유리 조각을 밟았을 수도 있다. 플라스틱 어항이라 물고기도, 고양이도, 나도 안전했다. 또 배타미 혼자 사는 어항이니, 물고기 한 마리만 찾으면 됐다. 여러 마리였다면 한 마리쯤은 놓치거나, 냉장고 밑으로 들어가거나, 이지가 먹었을지도 모른다. 환수하려고 받아놓은 물도 있었고, 베타가 좁은 곳에서도 생활 가능한 어종이라 유리컵에서도 당분간은 잘 버틸 수 있다.

그러고 보니, 어항이 깨진다는 조건 하에서는 최상의 상황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역시 운이 좋아!


모두 괜찮아. 출근 전이라 다행! 이지가 그중 잘한 일인 듯!

배타미가 오래 살 팔잔가봐.


그르네... 근데 자기 진짜 긍정왕이다 ㅋㅋㅋㅋㅋㅋ


톡을 마무리하고선 다시 크림을 발랐다. 이지가 옆으로 쓰윽 와 다리에 몸통을 스치고 지나간다. 미안하다는 거지? 이지의 등을 쓰다듬었다. 이지도 꽤 놀랐을테니까.

잘했어, 이지. 사고를 쳐도 이렇게 누나가 있을 때 치라고, 알았지?

** 고양이 이지의 이름은 영어 'easy'에서 따왔습니다. 고양이 너라도 편하게 살라는 저희 부부의 마음을 담았습니다.

** 물고기 배타미는 어종인 '베타'가 숫컷들의 경우 다른 물고기와 합사가 불가능한 공격적인 성향이 강하지만, 무늬나 지느러미가 매우 아름답습니다. 한자어 '排他(배타, 타인을 배척함)'와 '美(미,아름답다)'의 합성어로 지었습니다.


(후기)이지와 배타미는 아직 잘 지냅니다. 배타미의 어항은 조금 더 무거운 것으로 구입했습니다. 싱크대 벽에 어항을 딱 붙여 이지가 쉽게 밀어낼 수 없도록 조치했습니다. 여전히 이지가 배타미에게 관심을 보이곤 합니다. 다만 이지는 겁쟁이 쫄보라, 어항 사건 이후 예전만큼 가까이 가지 않습니다. 배타미는 이전보다 튼튼하고 무거운 어항에서 잘 지냅니다. 물고기와 고양이의 공존에 대해서는 더욱 고민중입니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화분 하나, 그림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