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도 기뻤으면 좋겠어.

남편과 내가 동시에 백수로 사는 당분간의 삶

by 캐롤

지난 주말, 친정에 들렸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남편이 툭 던지듯 물었다.

"당신, 얼마 전에 나한테 말했던 거 말이야. 그건 요즘 어때?"

"어떤 거?"."

"그 있잖아, 사는 게 재미없다던 거 말이야."

한 달전 쯤, 아이를 재우고 나와 식탁에 앉아 폰을 보고 놀던 남편에게 "나 사는 게 재미없어."라고 말했다. 그때는 진지하게 말했는데, 내가 왜 그 순간 그런 말이 툭 튀어나왔는지는 모르겠다. 그즈음에는 무슨 늪에 빠진 기분이었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고, 답답하고, 뭘 해도 재미가 없었다. 사실 요 근래에는 조금 나아지긴 했는데, 그냥 남편을 계속 걱정시키는 편이 나 살기엔 좀 더 수월하겠다 싶었다. 너무 이기적인가? 어쩔 수 없다. 또 지나치게 걱정하는 건 부담스러우니까 너무 심각하지 않은 선에서 대답했다.

"....... 그냥 그렇지 뭐."

"아니, 난 사실 요즘 기쁘거든."


이건 또 무슨 개똥 바게트에 발라먹는 소린가. 나 괴롭냐 물어보고선 자기는 기쁘다는 게 어이가 없기도 하고, 이 대화의 전개가 이해되지도 않았다. 사실 남편은 요즘 기쁠만하다. 희망퇴직을 한 지 열흘쯤 되었으니까. 회사 생활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빠르게 퇴직을 할 줄은 몰랐다. 퇴직 후 줄곧 싱글벙글하니 저런 말이 나올 만도 하지.

"다행이네, 자기라도 기뻐서."

그렇지, 둘 다 우울 모드인 것보다는 한쪽이라도 기쁘다니 뭐 다행이다 싶기도 했다. 그래서 나보고 어쩌라는 건가 싶기도 하고.


"아니, 그게 아니라, 내 말은 그니까, 자기도 일 좀 쉬면 말이야. 그래서 자기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살면, 좀 낫지 않을까? 난 나하고 싶은 거 하면서 살아서 너무 좋아."

그래, 나는 퇴직까지는 아니고 곧 휴직을 앞두고 있다. 반년 정도의 휴직을 꽤 오래 꿈꿨다.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낼 정도만 되면 나도 내가 하고 싶은 일을 맘껏 하며 지내보고 싶었다. 이런저런 이유로 차일피일 미루고 있었는데 내년 상반기로 정해진 것이다. 이후 남편이 퇴직하기로 결정하면서 잠시 주춤했지만, 그대로 밀어붙이기로 했다. 그의 삶은 그의 삶이고, 나의 삶은 나의 삶이니까. 당분간은 남편의 실업수당과 나의 육아수당으로 생활하고 부족한 것은 남편의 퇴직금을 갉아먹어야 할 테지만, 젊은 날 그 정도의 사치는 길게 보면 별 것 아닐 것이라고 믿는다.


"......."

"......."

그 말 이후, 우리 부부는 한참을 앞만 보고 있었다.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살아서 너무 좋다는 사람에게 또 "다행이네, 자기라도 기뻐서."라는 말을 하기도 그렇고, 뭐라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고, 차 안에 있으니, 어디로 도망도 못 가겠고.


"당신도 기뻤으면 좋겠어."


남편이 담담하게 말했다. 머릿 속이 멍해졌다. 나만 기뻐서 미안하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당신도 기뻤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그의 마음이 고마웠다. 요 며칠 남편은 미친 듯이 기쁘고 행복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기쁨의 끄트머리에 '사는 게 재미없다'는 아내를 떠올리면서 어떤 마음이었을까. 여전히 별일 없는 듯 사는 아내에게 요샌 어떤지 묻기도 조심스러웠을 그 마음. 휴직하고 쉬면 좀 나을 거라고 위로하고 싶었을 그 마음. '당신도 기뻤으면 좋겠다'라고 말해주고 싶었을 그 마음. 갑자기 겨우 손가락으로 막고 있었던 댐이 터져버린 듯 감정이 어지러워졌다. 영화처럼 눈물이 펑펑 쏟아져서 차 안에서 으앙으앙하고 울 것 같았지만, 참았다. 그냥 눈이 조금 빨개지고, 코가 빨개졌다가, 콧물을 한 번 들이켜고 괜찮아졌다.

"고마워."라고 말하고 싶었는데, 그 말은 나오지 않았다. 그냥, 무슨 말이든 하면 감정을 주체하지 못할 것만 같아 아무 말 없이 라디오를 켰다. 뭔가 시답잖고 시시껄렁한 농담들이 차 안의 분위기를 풀어냈다.


이제 새해가 다가온다. 다가오는 해에 우리 부부는 잠시 쉬어가기로 했다. 이 결정이 옳은 것인지, 그른 것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단지, 우리는 그 쉼을 후회하지 않도록 '잘' 쉬기로 했을 뿐이다. 쉬어 간다고 다음 길이 쉬워지는 것은 아닐 것이다. 또다시 삶은 힘든 순간을 맞이하겠지만 올해의 이 쉼이 우리의 묵은 감정들을 조금 털어내고 비워주기를, 우리에게 또 다른 에너지를 전해주기를 바란다. 또다시 힘내어 걸을 수 있는 '용기'를 얻을 수 있기를 바란다.

가끔 현실이 괴로울 때, 냉장고 위에 붙여 둔 하와이 여행 사진을 본다. 에메랄드 바다에서 선글라스를 껴고 노란 튜브에 올라 둥둥 떠있는 내 모습. 당분간 나는 그렇게 좀 둥둥 떠 있어 볼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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