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비우고, 당신을 담습니다.

나는 이런 글을 쓰고 싶습니다.

by 캐롤

글을 쓰겠다고 휴직을 하고 키보드 앞에 앉았다. 몇 달이 지났고 몇 달이 남았다. 이제 남은 날이 지나간 날보다 적다. 지금쯤 결과물이 나올 법도 한데 끝낸 글이 없다. 휴직을 하면 뭐든 쓸 수 있을 줄 알았다. 여전히 머릿 속이 멍하다. 휴직해서 글 쓰기를 시작했다고 해결된 건 하나도 없다.

솔직히 말하자면 난 뭘 써야할지 잘 모르겠다. 단지 '나는 써야만 한다'는 소명이 진하게 머릿 속에 있어왔다. 소설을 한 편 완성해보고 싶었다. 그리고 가능하면 계속 써내고 싶었다. 난 꾸준히 쓰는 사람이고 싶었다. 내 글쓰기에 대해 스스로 알 수 있는 것은 딱 이것뿐이었다.

모르는 것은 여전히 많다. 그래서 뭘 쓸 건지, 그게 단편인지 장편인지, 어떤 장르인지, 주인공은 누군지, 정말 쓸 수는 있는 건지, 이게 마무리는 되는 건지.

며칠 전 카페에서 멍을 때리다가 생각이 나는대로 시작해 소설을 새로 쓰기 시작했다. 나는 물고기를 키우는데 이 소설을 쓰기 전날 물고기 한 마리가 죽었다. 어항에서 죽은 물고기를 떠내던 일을 상황으로 삼아 글을 시작했다. 곧 인물을 생각해냈고, 다른 인물을 더 생각해냈다. 곧 그들에게 여러 사건이 생겨났다. 키보드에 앉기 전엔 생각지도 못했던 방향으로 글이 흘러가기 시작했다. 그들은 보육원에서 갓 독립하게 된 20살 여자애 둘이었다. 얼마전 성년이 되면 보육원을 나와 생활해야하는 일명 '보호종료아동'에 대한 뉴스를 봤었다. 그게 글에 영향을 준 모양이었다. 그런데 소설을 마무리하지 못했다. 소설을 시작하는 건 그나마 쉬웠다. 늘 어디서 어떻게 마무리지어야 이게 소설이 되는 건지가 모호했다. 난 이게 너무 어려웠다. 너무 모든 것이 깔끔하게 정리되면- 그래서 어떤 아쉬움도 남지 않으면 - 너무 삼류로 느껴졌다. 애매하게 마무리되면 이건 소설도 뭣도 아닌 글나부랭이 같았다. 그럴듯한 상황이나 사건, 관심이 가는 인물로 이야기는 시작되었지만 끝내 길을 잃고 인물들은 멈춰섰다. 그래서 내 바탕 화면엔 마무리짓지 못한 파일들이 이미 많았다. 우연히 쓰기 시작한 글이었지만 이번엔 마무리를 좀 지어보고 싶었다. 한 편을 온전히 마무리지어 완성해내야만 실력이 늘 수 있다는 어떤 작가의 조언이 떠올랐다.

보육원 아이들이 어떻게 생활하는지, 보육원에서 나와선 어떻게 생활하게 되는 건지, 구체적인 사례나 상황들을 제대로 모르니 소설에 현실성이 부족하단 생각이 들었다. 뭐든 더 알게 되면 좋은 결말도 떠오를 거란 기대가 있었다. 자료 조사를 핑계 삼아 소설의 마무리를 미뤘다. 도서관에 가서 이런저런 책들을 집어왔다. 집어오는 김에 남편이 좋아할만한 자기계발서도 함께 빌렸다. 집에 돌아와 남편에게 빌려온 책들을 소개했다.

"근데 자긴, 왜 이런 책만 읽어?"

"내가? 뭐가?"

남편의 질문을 듣고 내가 빌려온 책들을 다시 본다. 가스라이팅과, 장애 아동, 미등록 이주민, 동성애. 평소 내가 이런 주제의 책을 자주 읽긴 한다. 주류가 아닌, 소외된 사람들. 그래서 보육원을 떠나야했던 아이들의 이야기를 쓰고 있었던 걸까? 난 무엇이 쓰고 싶은 걸까?


내 첫 컴퓨터가 떠올랐다. 엄마가 그 컴퓨터를 구입한 건 내가 초등학교 3학년 때였다. 나는 엄마에게 컴퓨터를 배웠다. 지뢰찾기도 하고, 한컴 타자연습을 게임처럼 했다. 한컴 타자연습이 제공하는 '메밀꽃 필 무렵'과 '동백꽃'을 타자로 연습했다. 낱말들이 비처럼 내리면 빨리 쳐 낱말을 없애는 게임을 특히 좋아했다. 타자가 익숙해지고 난 뒤론 집에 혼자 있을 때 컴퓨터로 글을 썼다. 내가 아는 가족사부터 낱낱히 적었다. 엄마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나름 파일을 꽤 복잡한 곳에 저장해두었다. 엄마가 없으면 나는 어김없이 컴퓨터 앞에 앉았다. 소설을 쓰듯 집안의 여러 일들을 상세히 기록했다. 가족의 불행은 어디에서 시작했는지, 엄마는 왜 혼자 살게 되었는지, 친척들의 무관심이나 냉소를 우리가 어떻게 버티는지, 엄마가 없는 집에서 동생과 있는 시간이 얼마나 두려운지를 썼다. 아마 엄마가 그 글들을 봤다면 뒤로 자빠졌을거다.

내가 아는 가족사를 다 쓴 뒤론 내가 아는 모든 억울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썼다. 외할머니, 내가 이모라고 부르는 엄마의 친구들, 같은 반 친구의 억울한 사정을 내 나름대로 각색해 글로 썼다. 친구의 아빠는 엄마를 때렸다. 엄마가 외갓댁으로 도망을 가면, 아버지는 친구를 앞세워 외갓집으로 갔다. 아버지는 칼을 들고 자해를 하고 마당을 데굴데굴 뒹굴었다. 옷이 피칠갑이 되어 울부짖으며 바닥에 구르는 아버지를 보고 친구는 구토를 했다. 아버지가 내가 더럽냐고 친구에게 덤벼들어 할아버지 방으로 도망쳤다. 거기서 끄억끄억 우는데 엄마가 집에 가자고 했다. 친구가 울면서 그런 이야기를 하면 난 집에 와서 그 이야기를 글로 썼다. 내가 친구의 엄마가 된 것처럼 썼다. 친구 대신 내가 아줌마의 딸이라고 생각하고 썼다.

나의 글쓰기는 거기에서 시작했다. 나의 가족사를 글로 풀어내는 일이 자기 위로와 치유의 효과가 있다는 건 성인이 되어 알았다. 아마 그 글들 덕분에 나는 살아냈는지도 모르겠다. 억울한 사연을 글로 풀어내면서 어린 나는 참 많이도 울었다. 아무도 없는 집에서 컴퓨터 앞에 앉아 울면서 타이핑을 치는 초등학생을 상상해보라. 그게 나였다.

내 글쓰기의 시작이 그래서일까. 나는 억울하고 속상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쓰고 싶다. 그들의 이야기를 어떻게 사람들이 읽고 싶은 이야기로 만들까. 나의 글쓰기의 핵심은 거기에 있었던 게 아닐까. 내가 빌려온 책들의 표지를 다시 하나씩 읽어보면서 뭔가 큰 실타래 하나가 풀려나가는 것을 느꼈다. 여기서부터가 시작이구나.

그래서 난 로맨스도, SF도, 범죄물도, 스릴러도 쓰고 싶지도 않았나보다. 물론 로맨스, SF, 범죄, 스릴러가 수요도 많고, 잘 팔릴 테지만. 나는 단지 '여기에도 사람이 있음'을, '사람은 사람다운 대접을 받아야 함'을 자알 쓰고 싶다. 그래서 오늘도 그들의 삶을 들여다본다. 나를 조금 더 비워내고, 그 자리에 '그들'을 담아낸 뒤라야 내 글은 비로소 완성될 듯하다. 저 소설의 좋은 결말을 찾아 잘 적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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