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처음부터 그를 알고 있었다. 그의 사진을 보게 된 후로 그와의 대화부터 스킨십까지 상상하며 나름의 연애를 시작했다. 어떤 목소리를 가졌는지, 어떤 말투와 억양 일지 상상하며 그와의 연애를 이어나가고 있었고 가끔 이런 내가 미친 건가 싶다가도 상상인지 생각인지 모를 미래를 꿈꾸며 하루하루를 버텨내고 있었다. 그러다 그를 처음 만나게 되는 날이 다가오자 그가 어떤 옷을 좋아할지, 어떤 머리를 좋아할지 상상했다. 숏컷이 좋다던 그의 말에 작년 내내 숏컷이었지만 몇 달 전부터 힘겹게 길러온 머리를 다시 머리를 자를까 고민했다. 그날 입을 옷과 신발은 진작에 골라놓았지만 결국 당일이 되어서 8벌의 옷을 갈아입어 본 후에야 평소 잘 입지 않았던 짧은 치마를 입고 집을 나섰다.
만나기로 한 사람들 중 세 명만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 모습을 보고 너무 일찍 왔다 싶은 그녀는 20분만 더 있다 들어갈까 잠시 고민했지만 밖은 너무 추웠고, 딱히 몸을 녹일 장소가 없다는 생각에 이내 식당에 들어섰다.
“안녕하세요.”
처음 만나는 사람들과 너무 밝지도 어둡지도 않은 목소리로 인사를 나누고 자리에 앉은 그녀는 일찍 도착해 약간은 지루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을 사람들과 간단한 대화를 이어나갔다. 평소 초면인 사람에게도 자신의 속내를 다 드러내는 그녀였지만 오늘은 참아보기로 했다. 주문한 음식이 익어갈 때까지 그녀의 눈은 가게 유리문에 고정되어 있었고 마침내 사진 속 그의 얼굴을 가진 사람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아직 다들 안 왔네?”
오랫동안 기다려온 그였지만 막상 눈앞에 나타나니 소설 속 주인공인지, 게임 속 캐릭터인지 마치 쳐다보기라도 하면 사라질까 현실이 다시 상상이 될까 두려운 그녀는 그를 쳐다보지도 못하고, 자신의 옆자리에 있던 가방을 끝내 치우지 못했다. 결국 그는 그녀의 가방이 놓인 의자 옆자리에 앉아 사람들과 인사를 주고받았다.
그의 목소리, 말투, 억양을 상상 속 그와 매치해볼 틈도 없이 사라진 그는 부산스럽게 문을 열고 닫기를 반복하더니 마침내 다른 두 여자가 들어온 후에야 그녀와 다른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술병이 늘어지고, 음식을 담고 있던 접시가 바닥을 보일 때까지 그와 한마디도 나누지 못한 그녀는 평소대로라면 귀엽다, 잘생겼다 뇌를 거치지 않고 튀어나왔을 말들이 오늘따라 왜 머릿속에서만 맴도는지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진짜 좋아하고 있는 걸까. 생김새는커녕 목소리도 모르는 사람을 좋아하게 될 수 있을까. 운명일까. 아니 그 사람은 나의 존재도 모르는데 운명은 무슨.
다른 사람들과의 대화가 오가는 중에도 그녀는 속으로 본인과의 대화를 끊임없이 이어가고 있었다.
그녀는 화장실에서 자신의 얼굴이 얼마나 벌게졌는지 살펴본 후 좌석에 돌아가던 중 본인의 자리에 앉아있는 그를 발견했다.
“잠깐 제 자리에 앉아 계세요.”
처음으로 자신에게 말을 건네는 목소리를, 비록 친밀함이 느껴지진 않았지만 그래도. 그의 말에 대답이라 할 수도 없는 짧고 작은 ‘네.’ 소리를 떨군 후 그녀는 그가 앉아있던 자리에 앉았다. 그의 온기가 남아있는 자리에 앉으며 간접적으로 스킨십을 한 것에 만족하며 돌아가야 할까 또다시 본인과의 대화를 시작했다. 이대로 그냥 집에 가게 되는 걸까. 내가 어떤 노력을 해야 하나. 이런 건 보통 남자들이 하던데 나는 왜 내가 고민을 해야 하는 거지. 갖가지 생각으로 머릿속이 시끄러운 그녀는 그가 아닌 다른 남자들의 질문에 ‘네, 아니요.’를 번갈아가며 내뱉었고 '이럴 바에 집에서 밀린 드라마나 볼 걸' 하며 후회했다.
자리를 옮기자는 제안에 어떤 남녀는 자리를 피했고 아무도 그들에게 관심이 없는 듯했다. 그녀 역시 그들이 어두운 곳에서 무엇을 하든 상관없었고, 그녀는 그저 그와 한 두 마디라도 나누고 싶어 그가 집으로 돌아갈 때까지 자리에 남아있으리라 다짐했다.
하지만 첫 만남에서 타이밍과 자리선정이 가장 중요하다고 믿는 그녀는 두 번째 장소에서도 그와 다른 테이블에 앉게 되었다. 병풍 같은 사람들과 시답지 않은 대화를 해야 한다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멀리서나마 그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으니 좋다는 생각으로 자리를 지켰다. 그러다 그가 담배를 피우기 위해 나간 뒤 자리가 재정비되었다. 어쩌면 그의 옆에 앉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로 가득 찬 그녀는 그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나와 봐 봐.”
잠시 후 어쩐지 담배냄새가 나지 않는 그는 자신의 자리에 앉아있던 사람들을 자리에서 비켜내고 그녀를 본인 옆에 앉혔다. 어찌 된 영문인지 그녀는 의아했지만 그녀가 바라 왔던 자리였기 때문에 더 이상 의문을 갖지 않았다.
옆자리에 앉게 되었으니 그동안 상상해왔던 말들을 해야지. 무슨 말부터 하지. 그의 옆에 앉아 있는 그녀에게 소란스러운 술집의 기운은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온전히 그녀의 밤이었다. 옆에만 있어도 좋은 건 진짜 내가 이 사람을 좋아하고 있는 걸까 다시 한번 스스로에게 대답 없는 질문을 반복했다.
그러다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는 그의 엄지손가락을 본 그녀는 본인도 예상치 못한 말을 꺼냈다.
“손가락 귀엽다.”
아차 싶었다. 대게 이런 손가락을 가진 사람들은 콤플렉스가 있던데. 처음 본 사이에 대뜸 이런 말부터 꺼낸 본인을 어떻게 생각할까 자책하고 있는 그녀와는 달리 관심 없다는 듯이 대답을 한 그는 잠시 후 자신의 엄지손가락에 대해 두어 마디를 덧붙였다. 소란스러운 술집에서 처음으로 자신에게 말을 건네는 그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 모든 감각을 곤두세운 그녀는 다음으로 어떤 말을 이어갈지 고민했다.
그의 엄지손가락에서 핸드폰 화면으로 시선을 옮겨 대화 주제를 찾은 그녀는 안도의 숨을 뱉으며 물었다.
“축구 좋아하나 봐?”
그는 쌍꺼풀이 여러 겹 쌓인 두 눈을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고 학창 시절 자신이 축구선수로 활약했던 이야기를 꺼냈다. 드디어 그의 관심사를 찾아낸 그녀는 그의 밝은 갈색 눈동자를 쳐다보느라 대화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많은 사람들이 참석한 술자리에서 벗어나 그녀가 상상해온 둘만의 공간에서 둘만의 대화를 즐기고 싶었지만 20대 중반을 넘어서며 여자로서의 자존심을 지켜야겠다고 다짐했던 그녀는 이쯤에서 대화를 종료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가 때때로 흡연자들을 따라 가게 문을 열고 담배를 태우러 갈 때마다 혹여 자리가 바뀌진 않을까 불안한 그녀는 옆자리가 비워지면 자신의 가방에서 무언가를 찾는 척하며 옆자리를 지키기 위해 노력했다. 그녀의 노력 덕분인지 술집에 앉아있는 내내 두어 차례 자리가 이동되었지만 두 사람은 계속 서로의 옆을 지켰다.
두 사람은 축구 이야기를 나눈 후로 말을 섞지는 않았지만 가끔씩 서로의 무릎을 맞대고 있었다.
술에 취해서인지 고의인지 알 수 없었지만 이미 그와 상상연애 중이었던 그녀는 그와의 스킨십이 자연스러웠고 낯선 이들과의 술자리에서 가질 수 없는 편안함을 느꼈다. 술기운이 달아오른 그녀가 컵을 엎어 자신의 휴대폰 액정이 물에 잠겼을 때 그는 마치 제 휴대폰 인양 그녀 앞에 놓여있던 휴대폰을 들어 물기를 닦았다. 겉모습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그의 자상함에 그녀는 상상을 현실로 만들어야겠다고 다짐했다.
시간이 흘러 술에 취한 사람과 잠시 뒤 출근길에 올라야 하는 사람들이 하나 둘 비워졌고, 각각의 목적이 남은 사람들만이 남아있었다. 그와 그녀는 세 번째로 들어간 술집에서도 서로의 곁에서 술잔을 비웠다. 접시에 안주를 채워주고 술잔을 비울 때마다 물을 권하는 그의 태도에 그녀는 원래 모든 사람에게 친절하고 자상한 것이 아닐지 의문이 들었다. 하지만 아직까지 사람은 변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갖고 살아가는 그녀에게는 크게 문제 될 일이 아니었다.
해가 뜨기까지 두 시간 정도가 남아있었고 술집에서 나오는 무리는 그들뿐만이 아니었다. 낮에는 찾아볼 수 없었던 인파가 택시를 잡아타기 위해 길가를 가득 메었다.
“안녕히 가세요.”
인사를 마친 그녀가 돌아서려는 순간 반대편 무리 틈에 있던 그가 그녀에게로 왔다.
“뭐 좀 마실래?”
그를 만난 후로 둘만의 시간을 그토록 원했던 그녀는 그의 질문과 눈빛, 걸음걸이로 지금까지 품었던 기대감을 현실에 가져올 수 있겠다는 자신이 생겼다.
자정이 넘은 지 벌써 4시간이 흘렀고 그런 시간에 두 사람이 갈 수 있는 곳은 매우 한정적이었다. 그렇게 그들은 편의점이 나올 때까지 걸었다. 그녀의 예상보다 너무 일찍 나타난 편의점이 얄미웠지만 겉으로 내색하지는 않았다.
“아니, 지금 마시지 말고 손에 잡고 있어. 춥잖아.”
그에 대한 기대와 호기심으로 상기가 되어있던 그녀는 따뜻한 음료보다 네 손을 잡고 싶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자신의 마음을 먼저 드러내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날들이 떠올라 목소리를 내지 않았다.
올해 들어 가장 추운 시간으로 기억될 새벽. 술기운 때문인지 손에 쥔 음료 때문인지 옆에 있는 밝은 갈색의 눈동자를 가진 이 남자 때문인지. 살갗이 얼어붙을 것 같은 날씨에도 그녀는 짧은 치마를 입고 나온 것을 후회하지 않았다.
예전의 나였다면 날씨를 핑계로 안아달라고 했을 텐데. 조금 늦게 철이 들걸 그랬나. 아니야, 여자가 너무 적극적이면 도망칠 거야.
그러다 술김인지 그녀의 입 밖으로 속마음이 쏟아졌다.
“택시도 안 오는데 집에 가지 말까.”
도로 위 지나가는 택시들에서 벗어날 줄 몰랐던 그의 밝은 갈색 눈동자가 그녀 앞에 멈췄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응시했고, 그녀는 천진하게 웃었다. 그는 자신이 들고 있던 따뜻한 음료를 그녀의 왼쪽 주머니에 넣고 조금만 더 기다려보자는 눈빛을 보냈다. 그녀는 속으로 이 세상 모든 택시가 우리 둘 앞에 나타나지 않기를 바랐다.
오늘. 너무 추워서 두 입술이 떨어지지 못하는 지금. 더 이상 상상 속에서 그를 만나고 싶지 않았던 그녀는 잠시 망설이다 양손에 쥐고 있던 음료수 캔을 그의 볼에 가져다 대고 물었다.
“많이 춥지?”
“괜찮아. 좀 더 큰길로 가보자. 그쪽엔 택시가 있을지 몰라.”
간접적이었지만 무릎 이후의 첫 스킨십이었다. 도가 지나쳤을까. 아무에게나 이런 행동을 하는 애로 보면 어떡하지. 머리보다 손이 더 빨랐던 순간이 그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질지 걱정이 되기도 했지만, 이대로 헤어지기엔 오늘 밤 그와 함께 있고 싶은 마음이 너무나 컸다.
큰 길가로 나선 두 사람은 그 뒤로 말이 없었다. 부담스러웠나. 내가 실수한 걸까. 자책하는 소리가 들려오려 할 때 아쉽게도 빨간 불빛을 띄운 택시가 그의 시야를 향해 달려왔고, 그녀는 택시 뒷좌석 문을 열었다.
“고마워, 잘 가.”
평소 그녀는 몇 년 전부터 갖게 된 트라우마로 인해 누군가와 통화를 해야만 택시 뒷좌석에 앉아 있을 수 있었다. 하지만 불안할 틈 없이, 마음이 가득 차서인지 누구와도 연락되지 않은 상태로 집에 도착했고, 샤워를 하는 내내 한 가지 생각에 빠져있었다.
집에 잘 도착했다고 문자라도 보낼까.
알려주지도 않은 자기 번호를 가지고 있던 걸 알면 나를 스토커라고 생각하면 어떡하지.
그래도 나 때문에 밖에서 추위에 떨었는데 모른 척할 수는 없어.
그리고 이대로 잠에 들기는 싫어.
샤워를 마친 그녀는 잠들기 편안한 옷을 골라 입고 침대에 누워 휴대폰을 바라보았다.
뭐라고 보내지.
휴대폰 액정 화면이 꺼지면 버튼에 엄지손가락을 올려놓고 자신의 엄지손가락을 보며 그의 통통하고 동그란 엄지손가락을 떠올리기를 수차례 반복하더니 혹여 그가 잠이라도 들세라 급한 마음에 간결하면서도 자신의 의사를 밝힐 수 있는 최선의 문장을 완성했다.
- 고마워, 덕분에 집에 잘 도착했어.
건조한 대답이 돌아오거나 답장이 오지 않더라도 실망하지 않으리라 다짐한 그녀는 휴대폰을 내려놓고, 잠을 청하려 했지만 이내 진동이 울렸다.
- 잘 도착했다니 다행이네.
그의 친절한 답장과 함께 그녀가 탄 택시가 찍힌 사진이 도착했다. 비록 추위에 떨어 흔들린 사진이었지만 그녀는 상상이 현실이 된 것만 같은 기분에 꺼진 방안의 불을 켜고 자세를 고쳐 앉았다.
평소 알던 사람과 대화하듯 그들은 밤이 깊어 아침이 밝아 올 때까지 휴대폰을 내려놓을 줄 몰랐고 그녀는 그와 첫 번째 만남을 약속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