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속시간보다 얼마나 일찍 도착했을까. 오랜만에 마신 술 때문에 몸을 가누기 힘든 그는 그녀와 만나기로 한 카페의 벽 한 켠에 기대어 앉아있다. 그녀의 문자를 받고 기쁨에 취해 한 시간 거리에 있는 자신의 집에는 어떻게 들어갔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고맙다는 인사에 커피 한잔의 시간을 요청했고, 그녀는 영화의 시간을 되물었다. 그의 노력이 통했던 걸까. 그녀는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호의적으로 그에게 다가왔다.
어제, 정확히는 몇 시간 전 그녀가 음료수 두 캔을 자신의 뺨에 가져다 댄 순간 그녀와 좀 더 가까운 사이가 될 수 있을 것 같다는 가능성을 느꼈다.
창문을 바라보던 그는 멀리서 그녀가 보이기 시작하자 휴대폰을 들어 이내 시선을 액정에 꽂았다. 얼핏 보았지만 몇 시간 전까지 자신과 수줍게 통화하던 그녀가 맞다.
“일찍 왔네?”
취기가 어린 두 눈과 뺨이 술 때문인지 수줍음 때문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어제 그녀가 식당에 앉아 있는 순간부터 지금까지 예쁘장한 그 모습으로 그의 눈에 들어왔다.
그는 유리창 너머 앉아있는 그녀를 본 순간 느꼈던 감정은 아마 앞으로도 느낄 수 없을 것 같았다. 운명을 믿는 편도, 딱히 외로웠던 것도 아니었지만, 첫눈에 그녀에게 마음이 갔다.
그녀의 앞은 이미 만석이라 옆자리라도 선점해야겠다 다짐한 그는 문을 활짝 열고 들어갔다. 테이블 가까이 다가가자 그녀의 옆자리엔 가방이 놓여있었고 사람이 들어왔으니 예의상 가방을 치워주리라 생각하고 그녀의 옆으로 다가갔다. 그러나 자신이 앉지 않기를 바라는 건지 대화가 한창인 그들 눈에는 자신이 보이지 않는 건지 그녀는 가방을 치워줄 생각이 없어 보였고, 그는 가방 옆자리에 앉을 수밖에 없었다.
그 후로 그녀에게 무슨 말이라도 건네고 싶었던 그는 처음 만난 여자에게 어떤 말을 꺼내야 이상한 사람으로 오해받지 않을까 고민했다. 미리 연습 좀 해둘걸 그랬나, 다른 사람들은 무슨 대화를 하길래 저리 깔깔거릴까.
음식을 담은 그릇이 바닥을 드러낼 때쯤, 머릿속이 텅 비어버린 그는 결국 짧은 한마디를 건넸다.
“잠깐 제 자리에 앉아 계세요.”
오늘 술자리가 파하기 전 그녀에게 말이라도 건네보겠다는 소심한 다짐으로 식당을 빠져나왔다.
제기랄.
걸음이 느린 그녀는 12명의 사람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동안에도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집에 가버린 걸까. 이렇게 사람이 많은데 자리를 비워두는 건 사람들에게 오해를 살 것 같은데. 그가 초조해하던 사이 2차로 들어선 술집의 문을 열고 그녀가 들어왔고, 그들은 또다시 다른 테이블에 앉아있었다.
‘생각해내자.’
술과 안주를 고르는 동안 그는 이 칙칙한 밤을 뚫고 나갈 방법을 연구하느라 머리가 아팠다. 잠시 후 그는 자신의 옆자리에 앉아있던 세 사람을 걷어내고 밖으로 나갔다.
‘담배를 피우러 나간다고 생각하겠지?’
문 밖에 선 그는 비를 비해 지붕 아래에서 그녀가 앉아있는 테이블을 바라보았고, 어떻게 자리정돈을 해야 할지 고민했다.
그때 눈치는 없지만 모임이 있는 날이면 항상 함께 담배를 피우던 형이 그에게 다가왔다.
저 사람한테 걸리면 나는 오늘 이 사람과 밤을 보낼지도 모른다. 피하자.
“난 다 피웠어, 먼저 들어갈게.”
형은 담배를 물고 있지 않던 그에게 담배 한 개비를 꺼내 건네려 그에게 뻗었던 손을 자신의 입으로 가져갔다.
생각을 마치지 못한 그는 일단 자신의 자리에 돌아가는 척 두 사람에게 자리를 비켜달라고 말한 뒤 그녀가 비켜줄 차례가 오자 그녀에게 손짓했다.
“들어가서 그냥 앉아.”
그렇게 바라 왔던 그녀의 옆이었지만 막상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아니다. 그냥 그녀가 내 옆에서 종알거리는 것만으로도 좋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녀가 그에게 먼저 말을 걸어왔고 그렇게 두 사람의 새벽은 깊어졌다.
술자리가 끝나고 서로의 행방을 묻는 대화가 오갔다. 남아있던 사람들과 인사를 마친 그는 앞서 걸어가던 그녀 옆을 따랐다.
“뭐 좀 마실래?”
자연스럽게. 마치 둘의 방향이 같은 것처럼.
“너는 반대편으로 가야 하지 않아?”
“맞아.”
아직 그녀의 마음을 알 길이 없는 그는, 거짓말에 젬병이었던 그는, 최대한 태연한 척 연기했고, 그런 그가 싫지 않은 모양인 그녀는 더 이상 물어오지 않았다.
한 손에 음료를 하나씩 집어 든 두 사람은 택시 정류소로 향했지만 이미 수많은 인파가 정류소를 점령하고 있었다. 그렇게 십분, 이 십분 시간이 흘러도 손님을 태운 택시만 지나갈 뿐 할로윈 축제 분위기에 취한 사람들 사이에서 빈 택시를 찾기란 여간 쉬운 일이 아니었다.
“택시도 안 오는데 집에 가지 말까.”
순간 그녀의 입에서 나온 문장이 의심스러워 그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웃고 있었다.
농담이겠지. 설마 나랑 밤새 같이 있자는 소리인가. 이대로 함께 밤을 보내면 진지한 관계로 발전하기 어려울 것 같은데.
요즘 젊은 남자치고 꽤 순진한 편인 그는 당황한 기색을 띄지 않기 위해 좀 전보다 더욱 열심히 택시를 잡아채기 위해 도로로 나섰다.
그를 뒤따라온 그녀는 자신의 손의 들린 따뜻한 음료수 캔 두 개를 그의 뺨에 가져다 댔다.
“많이 춥지?”
그는 그녀의 손목을 잡아 그녀의 주머니에 다시 찔러 넣었다.
“괜찮아. 좀 더 큰길로 가보자. 그쪽엔 택시가 있을 거야.”
얼마 후, 그녀를 택시에 태운 그는 택시 번호판을 찍었지만 추위 때문인지 그의 맥박 때문인지 사진은 흔들려버렸다.
집에 가는 길. 그녀가 집에 도착했다는 정도의 연락은 주지 않을까 내심 기대했다. 그녀를 향했던 가능성이 기대감으로 커져가는 순간 그는 그녀에게 번호를 알려준 적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번호도 알려주지 않고 연락을 기대하다니.’
다음 모임 일정이 잡힌 후에야 그녀를 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니 그는 모임의 운영진 자리를 내려놓은 것이 후회됐다. 막 후회를 그만두려던 찰나 그의 휴대폰 속에 11자리의 숫자로부터 문자가 왔다.
- 고마워 덕분에 집에 잘 도착했어.
뉘앙스로 보나 앙증맞게 웃고 있는 프로필 사진으로 보나 이 11자리의 숫자는 그녀였다.
그리고는 처음으로 그녀를 찍은, 정확히는 그녀가 타고 있는 택시를 찍은 사진을 전송하며 다음 모임이 있는 날에는 반드시 둘만의 시간을 갖기를 원하는 마음을 담아 커피 한잔을 요청했다. 그러자 그녀는 그가 생각지도 못한 답변을 했고 몇 시간 후, 날이 밝아오면 함께 영화관에 가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