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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에 물든 밤

by 단미

우리나라 사람들이 이렇게 철학에 관심이 많았나 싶을 정도로 철학책이 꾸준히 인기다. 니체와 소크라테스 책은 말할 것도 없고 공자와 논어 그리고 부처의 말까지 두루두루 팔린다.


대한민국 사람들이 지혜를 사랑하는 마음이 갑자기 드높아져서 철학책이 많이 팔리는 건 아닐테고 아마 삶은 힘든데 해답은 없으니 기댈 곳을 찾기 때문은 아닐까.


몇년 전 철학책을 좀 읽어볼까 하는 마음에 그나마 진입장벽이 낮아보이는 <처음 읽는 서양철학사>를 골랐다. 대체로 "처음 읽는 OOO" 이런 제목이 붙으면 독자가 부담없이 시작할 수 있게 쉽게 쓰여서 도전해볼 만하다는 점을 노렸는데, 기대 이상이었다.


"철학 사상을 이해하고 싶다면 철학자들의 삶을 먼저 꼼꼼하게 살펴보자"는 저자의 말처럼 철학자들의 삶 속에 녹아있는 고민이 어떻게 철학 사상으로 이어졌는지를 이야기하듯 들려주어 재미있다. 글 뿐만 아니라 미술도 음악도 작품 속에 작가의 삶이 반영되듯이 철학도 마찬가지인가보다. 진입장벽이 낮을 거란 예상도 잘 들어맞아서 아주 쉽고 다 읽고 나면 철학책 좀 읽었다는 우쭐함에 한 단계 높은 책으로 넘어가고 싶은 욕구가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철학이란 주제로 쉽고 재미있는 책을 쓰기가 쉽지 않기에 나는 이 대단한 글쓴이가 누군지 궁금했다. 책에는 안광복이란 이름을 가진 중동고등학교 철학교사라는 짧은 소개가 있지만 그것만으론 어쩐지 성에 차지는 않았다. 어떤 분이길래 입시 위주 교육 현장에서 비주류 과목인 철학을 삼십 년동안이나 가르칠 수 있으며 철학책을 서른 권 넘게 쓸 수 있는지. 글도 잘 쓰셔서 <A4 한 장을 쓰는 힘>이라는 글쓰기 책도 내실 정도인 마법사 같은 사람.(이 책은 책 후기를 쓰는 방법 위주로 설명하고 있지만 글쓰기 기본기를 다지는데 아주 도움이 된다.)


이런 분이 동네에서 현장 강의를 하신단다. 어찌 가지 않을 수 있을까. 얼씨구나 하며 접수 링크가 열리자마자 신청하고 강연날을 손꼽아 기다렸다. 호기심과 설렘으로 선생님을 마주한 순간 나는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유튜브 영상에서는 보이지 않았던 순수함이 중년 아저씨의 모습을 한 채 내 앞에 서 있었다. 오십이 넘은 평범한 아저씨가 이렇게 맑은 눈빛을 가질 수 있는지 현실감이 없어도 너무 없었다. 후드 달린 수도복을 입은 채 중세 수도원으로 곧장 순간 이동을 해도 어색하지 않을 분위기는 또 무엇인지. 철학을 그저 학문에서 그치지 않고 종교인처럼 수양까지 하게 되면 속세에 살면서도 수도사같은 분위기를 갖게 되는걸까.


묘한 분위기와 달리 강의하실 때는 전문성이 넘쳤다. 스토아 학파와 에피쿠로스 학파가 전하는 사상이 무엇인지, 우리 삶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는지를 알려주시는데 어려운 철학을 대중에게 어떻게 쉽게 전할 수 있는지 많이 고심하신 게 느껴졌다. 수강생들이 지루해하지 않게 중간중간 농담을 던지시는 것도 연 100회 강연을 하시는 강연 전문가셔서 그런지 아주 자연스러웠다.


그보다 더 돋보였던 건 철학에 가진 애정과 그 애정을 나누어 주고 싶어하는 마음이었다. 자신이 공부하는 학문을 사랑하고 배움에 열정이 있으며 깊은 지식을 가진 사람이 보여주는 멋짐의 표본이 바로 이런 모습이 아닐까. <처음 읽는 서양철학사>를 읽고 글쓴이에게 가진 호기심은 존경으로 바뀌었다. 내가 글쓰기 강사가 된다면 수강생들에게 이런 울림을 주는 사람이 될 수 있을지....


철학(Philosophy)이라는 용어는 고대 그리스어의 필로소피아 즉, 지혜에 대한 사랑에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지혜에는 정답이 없고 배움에는 끝이 없다. 강연을 들은 시간 동안 나는 철학을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지혜의 작은 모퉁이를 돌아보는 귀한 경험을 하였다. 철학을 배우고 지혜를 향해 나아가면 내 글도 더 무르익을 수 있을까. 갈 길이 더 멀어지는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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