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아홉시 삼십 분.
카페에 온지 한 시간 정도 지난 무렵이다.
한 무리의 손님들이 소란스럽게 들어오며 자리를 잡더니 조용한 카페 분위기는 아랑곳 하지 않고 큰소리로 떠든다. 나를 포함한 나머지 두 테이블은 조용히 뭔가를 하고있는 터라 카페 안은 그 무리의 목소리만이 가득찼다. 소란스러운 무리의 주인공은 새학기가 시작되어 아이들을 학교에 보낸 어머니들 대여섯 명으로, 모두다 밀린 이야기를 한가득 풀어놓고 싶은 마음인 것 같았다. 말하는 속도가 빠른 것은 물론이거니와 다른 사람 이야기가 끝나기가 무섭게 또다른 사람이 재빠르게 치고 들어가 바톤을 넘겨받는다.
이어폰을 챙겨오지 않은 나는 졸지에 방청객 신분이 되어버렸다. 모르는 사람의 가정사는 굳이 듣고싶지 않았으나 카페 안에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도 들을 수 밖에 없는 상황.
대화 속 주인공은 아이들이다. 성격이 어떻고 어느 학원을 다니고 요즘 과심있어하는 것이 무엇이고...
그 분위기를 견딜 수 없는 나는 읽던 책을 챙겨 카페를 나가기로하고 무리를 지나쳐 밖으로 나갔다. 카페 문을 여는 순간까지 아이들 이야기로 가득찬 말소리는 내 뒤를 따라왔다.
조용한 분위기를 배려하지 않는 것도 불편했지만 그보다는 궁금함이 앞섰다.
그들은 어찌하여 자신들에 대한 이야기하지 않는걸까?
아이들 이야기를 빼고나면 할 얘기가 있긴 한걸까?
'나'에 관한 이야기는 언제, 누구와 할까?
여자는 결혼을 하면 남편 중심으로, 아이를 낳으면 아이 중심으로 삶이 바뀐다. 나는 어릴 때부터 아이들만 바라보는 엄마들의 삶이 안타까웠다. 엄마들은 만나면 자식 얘기만 하는건 그때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았다. 엄마로서 해야할 역할은 다 하되, 자기 자신을 지키는 삶을 살 수는 없는걸까?
우리 시부모님은 그런 면에서 꽤 괜찮은 롤모델이시다. 자녀가 어릴 때부터 스스로 결정하고 책임지는 삶을 살도록 교육하셨고, 자식 뒷바라지에 모든걸 걸지 않으셨다. 자녀 교육에 올인하지 않는 대신 무얼 하든 간섭하지 않으셨고, 다행이 남편과 시누이들은 큰소리칠만큼 내세울 건 없어도 앞가림은 잘 하며 살고 있다.
안부 전화를 드리면 친구분들과 맛집을 가고 등산을 하고 운동하시느라 늘 바쁘시다. 자녀들은 그저 생존신고만 하면 될 뿐 미주알고주알 떠들지 않아도 된다. 때로 우리집에 오시더라도 다음날 아침이면 부리나케 내려가신다. 우리를 배려해서가 아니라 친구들이랑 약속이 있으시다는 이유로.
시부모님의 삶은 자식들로 채우지 않으셨다. 그분들의 삶엔 자신이 주인공이다. 예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다.
시대가 바뀌었어도 자기 삶에 아이들을 데려오는 엄마들은 여전히 많다. '어머니'라는 역할과 자기 인생을 분리하고, 인생의 주인공은 자신이란 걸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우리가 바라보는 우리 부모님들이 자신의 삶을 살 때 행복해보이는 것처럼 우리 아이들도 마찬가지일테니까.
이번에 새로 만든 '엄마독서모임'에서 "자기 소개에는 나이가 몇 이고, 아이는 몇 살이고.. 이런 얘기보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 이야기해주시면 좋겠다"고 제안하였다. 우리 독서모임에 참가하는 사람은 우리의 자녀가 아니라 우리 자신이니까. 우리의 꿈과 희망에 대해 더 알아가는 시간을 만들고싶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