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단미 Mar 19. 2024

지루함을 견디는 시간

데이터 3천개를 입력하는 1차 프로젝트를 간신히 끝내고 이제 남은 분량은 1800개.

한 항목당 글과 사진 두어장이니 1800개가 아니라 세 배쯤인 5천 4백개라고 해야할까.


가나다 이름순으로 입력해야하는 탓에 자음이 비슷한 이름이 연달아 나오면 정신이 혼미해진다. 

방금 전에 입력한 이름이 윤성극인가 윤상극인가.


이쯤되면 쉬어야하는 시간이다.

커피 한 잔 들고 바깥 공기를 쐬며 동네 한 바퀴 산책해야만 하는 시간.

혼란한 머리를 붙들고 고집스레 작업해봤자 오류가 많아져 검수자 괴롭고 나도 재차 고쳐야하는 번거로움이 커지니 되도록이면 맑은 정신으로 정확하게 하는 것이 여러모로 좋다.


가끔은 정신이 혼미하다기보다 올칵 할때가 있다. '올칵'이란 표현은 엄마에게서 배웠다. 하얀 피부와 고운 외모가 뜨개질같은 작업이 참 잘 어울릴 것 처럼 보이지만 의외로 손재주는 그다지 없는 엄마다. 그래서 작은 구슬을 이용해 귀걸이 등을 만드는 비즈공예나 한땀한땀 정성스레 놓아야하는 십자수 같은 작업을 보기만 해도 '올칵' 하신단다. 나는 엄마의 세 딸 중 유일하게 엄마의 '올칵'을 물려받았다. 그래서 정확하게 해야하지만 작업 자체는 단순한걸 하다보면 자주 올칵한다.


직업은 에디터인데 하는 일은 대체로 데이터 정리다보니 물리적으로 시간만 많이 잡아먹고 생산성은 없는 는 것 같아 허무함에 스트레스가 컸다. 사람이 하는 일이기에 틀릴수도 있건만 오류 없이 완벽해야 겨우 본전이니 일에서 의미를 찾기도 어려웠다.


그렇게 불평이 나날이 늘어갈때쯤 디자이너들이 하는 일도 별다르지 않다는 걸 알았다. 사장님이 입에 달고 사는 '크리에이티브'한 건 처음 시안 잡을때나 필요할 뿐 그 후로 여러 차례에 걸친 교정작업에서는 오탈자와 띄어쓰기, 구석에 있던 사진을 가운데로 끌어내는 등 단순하고 재미없는 일인건 마찬가지다.

그 지루한 시간들을 잘 버틴 디자이너는 연봉이 올라가며 승진도 하며 능력을 인정받는다. 


학교 교육에서 우리가 배운건 국영수 과목이 아니라 45분을 꼬박 앉아있는 훈련이 아니었을까.

재미라곤 가끔 던지는 선생님의 농담따먹기뿐인 수업 시간 내내 들썩이는 엉덩이를 잘 누르고 있는 연습 말이다. 나는 그 훈련이 부족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뒤늦게 중년의 나이에 지루함을 잘 버티는 것이 중요함을 깨닫나보다. 


<세상에서 가장 발칙한 성공법칙>에서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는 이렇게 말했다.


"지루해지는 것에 면역력이 생긴다면 

세상이 이루지 못할 일이 없다"


이제는 올칵하기 전에 머리를 비우러 규칙적으로 자리에서 일어나고 단순한 작업으로 머리가 둔해질 무렵엔 잠깐씩 책을 보며 환기를 한다. 지루함의 가치를 깨달음과 동시에 꿈이 생겼기에 가능한 일이다. 


올해 역시 지난해와 다름없이 사진 원본을 찾고, 보정을 하고, 인쇄 들어간 데이터를 정리해 웹에 올리는 중요하지만 단순반복인 일을 해야한다. 그러나 마음 한 켠에선 새롭게 맞이하는 기분도 든다. 지루한 일을 빨리 끝내고 나면 원하는 글쓰기도, 책읽기도 할 수 있는 보상이 금방 따라온다는 걸 알기 때문일까.

브런치에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이 순간처럼 말이다.








작가의 이전글 봄을 상징하는 꽃은 OOO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