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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행하는 J Jan 12. 2021

자궁과 이별을 준비하며<2>

잘가라, 내 몸의 일부였던 자궁아

"6개월 후에 봅시다"


"물혹도 있고... 근종도 있네요."

그 때 의사의 말은 마치 나 아닌 다른사람에게 하는 말 같았다.

자궁경부암 검사는 물론이고 무슨 일 있을때마다 툭하면 찾아왔던 산부인과 아니던가. 그때마다 비용을 지불하고 초음파 검사도 꼬박꼬박 빠지지 않고 했었는데... 또 뭐가 있다니?

"용종 없애듯이 긁어내거나 없앨 수 없나요?" 라는 나의 말에 의사는 "지금 할 수 있는건 없다"고 했다. 하지만 그냥 없어질수도 있고 크기가 더 커지지만 않으면 별 문제는 없다고도 했다.


40살이 되던 해에, 불혹의 나이에 접어 든 것을 축하라도 하듯이 위내시경 국가검진을 받으라는 우편물이 왔다. 2, 30대를 참으로 즐겁게 보낸 나는 툭하면 위가 쓰렸지만 그때마다 겔포스 한 포로 버티곤 했었는데, 왜 그랬는지 그때의 위내시경 국가검진은 남다르게 다가왔다. 그게 40살이라는 나이의 무게였던 걸까. 주변에서는 위내시경 받을때 대장 내시경도 함께 받으라고 권유했고 처음이면 수면으로 하는게 좋다는 조언도 잊지 않았다. 

그래서 위와 대장 수면내시경을 처음으로 받았고, 검사 후 한참이 지나 의사와 마주 앉았다. 

그때 그 젊은 의사는, 위에는 위염 증세가 있지만 약으로 치료가 가능한 정도이고, 대장에는 용종이 몇개가 있어서 잘라냈다며, 내년에 다시 한번 검진을 받으라 했다. 

아, 나에게도 이런게 올 수 있구나. 아마도 그때 정신이 번뜩 들었던 것 같다. 

그리고 일년 여가 지나 무려 '국립암센터'에 위대장 수면내시경을 예약했고 검사를 마치고 난 후 들려온 반가운 응답은, 

"깨끗합니다."

그랬다. 미리 검사를 받으면 무언가 있던게 없어질 수도 있고 깨끗할 수도 있구나 라고 생각이 들었다.

그 뒤부터 꼬박꼬박 국가검진이 나올때마다 위대장 내시경을 함께 받고 "꺠끗하다"라는 답을 들어왔다. 그런데, 자궁에 있는 근종이라는건 그게 안된다고?

워낙 주변에서 근종, 근종 말을 많이 들어왔기에, 사실 별로 크게 걱정이 되지는 않았다. 다만, 할 수 있는게 없다는 말이 황당했어서, 예전에 십년 넘게 살았던 동네의 ㅂ산부인과를 다시 찾았다. 다른 병원에서는 뭔가 다른 대답을 들을 수도 있을꺼라 기대하며.


이떄만 해도 3.3, 2.0, 0.8센티였는데.


친절하게 초음파 사진까지 출력해준 여의사는, 6개월 후에 다시 보자고 했다. 

그리고 그렇게 5개월 쯤이 흘렀다.


이별이라 부르리


그동안 나의 생리는 몇번을 건너뛰었다.

어차피 폐경이 다가오는 40대 후반. 별로 신경이 쓰이지도 않았다. 그런데 어느날 배가 살살 아파오며 생리를 시작했다. 그런데 4일, 5일이 지나도 양이 줄지 않았고 일주일이 되가도록 양이 너무 많아서 거의 한 시간마다 패드를 교체해야했다. 일주일이 넘어가자 남편도 슬슬 걱정하기 시작했고 나도 여러가지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처음에 근종을 진단했던 동네 병원에 전화를 해서 물어보니 생리 중이라도 빨리 병원에 와보라고 했다.

다시 초음파 검사를 하고나서 의사는, 

"자궁내벽증식증이네요. 소파술을 해야겠어요. 그리고...."

그리고? 

"그 나이에 이렇게 근종이 빨리 자라는게 좀 의아하군요. 아무래도 자궁을 들어내는게 좋을 것 같습니다."

지금, 나한테, 말로만 듣던, '자궁적출'을 하라는 건가.


적출[摘出] :  끄집어내거나 솎아 냄


세상에서 그 뜻에 비해 단어 자체가 무서운 말 중에 최고가 아닐까 싶다.

왜 굳이 끄집어내거나 솎아내는 뜻을 가진 단어가 '적출'일까. 아 여전히 입에 올리기 어려운 말이다.

- 그래서 나는, 이별이라 부르기로 했다. 


10여년이 지나 재발한 자궁내벽증식증은 안중에도 없었다. 대신 5센티를 넘게 커버린 근종때문에 수술을 하는게 좋겠다고 하는 의사의 말은 너무나 비현실적이어서 내가 겨우 꺼낸 말은 "꼭 해야하나요?" 였다. 내 자궁이 앞으로 몇년이나 그것의 소임을 하게 될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그렇다고 굳이 미리 활동정지선고를 내릴 필요가 있을까. 머리 속에 생각이 많아졌다.

가장 먼저, 우리 동네 맘카페에 올라온 글들을 찾아봤다. 그 수술을 했다고 하는 글들은 심심치 않게 보였다. 그리고 어느 병원이 좋다, 큰 병원으로 가라, 뭐 어떻게 해라, 이렇게 저렇게 했다 등등 각종 간증과 조언들이 넘처났다. 한참동안 그 글들과 댓글들을 읽어본 후, 큰 병원으로 가기로 했다. 수술을 진짜로 하게 되더라도 아무래도 큰 병원이 낫지 않을까 싶었다. 

소파술은 그 병원에서 하기로 하고 자궁이별에 대해서는 강남의 ㅅ병원을 예약했다. 며칠 후 가지고 오라는 서류들을 챙겨 강남까지 내달렸다. 다시 초음파 검사를 하고 의사와 마주 앉았다. 

"수술을 하는게 좋겠어요. 자궁 내벽과 너무 가깝게 붙어있기도 하고......"


남편의 표정은 담담했다. 나도 별 감정이 느껴지지 않았다.

다만, 40년이 넘게 살면서 특히 내가 기억하는 한 나는 입원을 하거나, 응급실에 실려가거나, 사고를 당하거나 어디가 부러지거나 했던 적이 단 한번도 없었다. 소소하게 눈이 아파 안과에 가고, 뭐가 나서 피부과에 가고 허리가 아프면 한의원을 가는 그 정도였는데, 나도 수술이라는걸 하게 되는구나 싶어 복잡한 감정이 들었을 뿐이었다. 

코디네이터를 만나 입원과 수술날짜를 잡고 그에 대한 설명을 듣고, 피검사, 소변검사, 심전도 검사를 받았다. 

철분제를 사서 먹고, 그 외에 다른 약은 먹지말라는 당부와 함께 입원 일주일전에 병원에 와서 철분주사를 맞기로 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렇게 약 한달쯤 후에 수술을 하기로 했다.


캐롤이 여기저기에서 들리기 시작했지만 자유로운 외출도 쉽지않았던 2020년 12월 초. 부산했던 12월이 지나고 새해가 밝았고, 랜선으로 해돋이를 보게 된 첫 해였다.

새해가 밝자마자 간 수치와 혈압, 그리고 철분주사를 맞기 위해 두어변 강남의 병원을 다녀왔다. 그리고 마침 근무하던 회사와 계약이 끝나 시간마저 많아져서 그 사이 나는 소소하게 맥주 한두잔쯤 마시며 영화도 보고 틈틈이 장도 보고 늦잠도 푹 자는 편안한 생활을 해왔는데,


철분주사를 맞고 있던 그 두 시간.

문득,

입원 날짜가 며칠 안남았다.


나 뿐만 아니라 세상의 수많은 여성들이 겪는일이라 생각하니 

아무렇지 않지만 두렵고, 무섭지만 담담한 기분이다. 

그렇게, 지금, 나는 내 자궁과 이별을 준비하며 짐을 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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