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danori May 02. 2020

피우지 못한 꽃

싱가포르 전투 (1942) 와 그 이후

* 사진 설명: 1942년 2월 싱가포르 전투 막바지에 벌어진 일본 25군 사령관 (가운데 왼팔을 들고 있는) 야마시타 중장과 영국 말레이 사령관 (왼쪽을 쳐다보는) 퍼시발 (Percival) 중장 간의 항복 협상 장면.


---


이번 학기에 개설한 안보학 강의가 무사히 끝났다. 내 분야임에도 그동안 강의 기회가 없어 늘 걸렸는데 마음의 짐을 덜어낸 기분이다. 특히 그동안 소홀했거나 궁금했던 주제 중심으로 구성해서 개인적으로도 배운 게 많다. 싱가포르 전투 (1942)가 그런 케이스다. 몇 가지가 기억에 남아 기록에 남긴다.


싱가포르 전투 수업은 간략한 강의 이후 “싱가포르 함락은 필연적이었나?”는 주제로 학생들에게 일본의 공격 전술/전략, 영국의 방어 계획, 그리고 전투의 전개 등을 요약, 평가케 했다. 싱가포르 전투는 중국 전선에서 차출된 일본의 정예 사단들로 구성된 25군이 (3개 사단, 35,000명 병력)  풍부한 전투 경험을 바탕으로 공병전, 속도전, 기만술, 지형 극복 능력 등에 압도적인 능력을 보이며 우왕좌왕하던 영국군 (90,000여 명)을 순식간에 굴복시킨 전투다.


일본 대본영이 원래 말레이 반도 작전에  5개 사단 병력을 내준 것을 사령관인 야마시타 중장이 보급선에 부담을 줘 속도를 늦출 수 있다는 이유로 3개 사단만으로 25군을 꾸렸단 부분도 흥미롭다. 야마시타는 속도에 승패에 달려있다고 판단했고 실제 25군은 말레이 반도 북쪽에 상륙한 지 70일 만에 싱가포르 점령에 성공한다. 일본 대본영 시간표에는 100일로 예상된 작전이었다.


3명의 학생들이 영국이 이렇게 무기력하게 무너진 여러 요인들을 발표하는데, 뜬금없이 오래된 편지 스캔본이 파워포인트로 띄어졌다. 발표 학생 중 한 명인 교환 학생이 나오더니 설명을 이어간다. “이것은 싱가포르 전투에 참전했던 저희 할아버지가 일본군 포로로 잡혔으며 현재 생사를 알 수 없다는 당시 영국에 있던 가족들에게 온 통지문입니다.”


그 이후는 더 기가 막힌다. 일본은 100,000여 명에 달하는 영국군 포로를 각종 공사에 강제 동원하는데 이 학생의 할아버지는 잠시 포로수용소에 있다 영화 “콰이 강의 다리”의 배경으로 유명한 태국-버마의 철도 공사 현장으로 보내진다. 할아버지가 살아계셨구나! 하는 기대가 되살아나는 순간 학생이 설명을 마친다, “할아버지는 버마에서 나오지 못했습니다. 거기에 묻혀 계세요. 싱가포르로 교환 학생으로 온 것도 할아버지를 뵙고 싶어서였습니다.” 학생이 어렵게 참던 눈물을 흘렸고 이어 숙연한 침묵이 흘렀다. 다행히 학생은 코로나 바이러스로 국가 간 이동이 어려워지기 전에 할아버지 묘에 다녀올 수 있었다.


전쟁에서 발생하는 수많은 희생자 하나하나에 담긴 삶의 무게를 가볍게 다루지 말라는 요구가 전쟁 공부 초보자의 치기 어린 외침으로 들릴 때가 있다. 안보 공부의 통과의례같이 그 무게를 고민하는 시기는 누구나 거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익숙해서 둔감해진 부분도 있다. 싱가포르 전투의 전략/전술 시사점만큼이나 그 숙연한 침묵의 순간이 학생들 기억에 오래 남길 바란다.



항복과 Sook ching 대학살. 그리고 Cyril Wild


강의 준비를 하다 보니 자연스레 싱가포르 전투 이후의 역사도 접하게 됐다. 항복 이후 싱가포르는 비극으로 치닫는다. 항복 문서 서명 당시 비전투원을 보호하겠다던 야마시타 중장의 약속이 일본 헌병대가 적게는 6,000명 (일본 추정) 많게는 70,000여 명 (싱가포르 추정)에 달하는 중국인들을 학살하는 ‘sook ching’ 대학살을 저지르며 백지장이 되면 서다.


(좌) Sook ching 대학살 발생 지역 (우) 싱가폴 차이나 타운에 세워진 Sook ching 대학살 기념비


항복 문서 조인을 위해 이동 중인 영국군 참모부. 오른쪽 끝 뒷짐을 진 이가 퍼시발 영국군 사령관. 왼쪽 끝 백기를 들고 있는 이가 통역관이었던 Cyril Wild 소령이다.


야마시타 중장은 종전 이후 열린 전범재판에서 싱가포르 점령 이후의 치안은 일본 헌병대 책임이었으며 자신은 이 대량 학살을 명령한 적도 보고받은 적도 없다고 증언한다. 그 심문을 맡은 이는 싱가포르 항복 당시 영국군 사령관의 통역관을 맡았던 Cyril Wild라는 인물이다. 그의 삶의 궤적이 범상치 않아 싱가포르 전투 공부의 삼천포에 빠져렸다.


Wild는 옥스퍼드 대학을 졸업한 인재로 전쟁 전에 일본 내 석유회사에서 근무하면서 일본어를 익힌 경험으로 말레이 주둔군에 소령 계급의 통역관으로 복무했다. 항복 문서 조인을 위해 백기를 들었다 그 치욕감에 백기를 땅에 던져버렸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로 자존심도 강했다. 1942년 2월 싱가포르 항복 이후 창이 포로수용소 생활을 하다 다른 전쟁 포로들과 함께 태국-버마 철도 공사에 강제 동원된다. 그 이동 과정과 강제 노동 현장에서는 일본군의 학대와 폭력으로 수많은 희생자가 발생했는데 3년 동안 Wild는 자신과 다른 포로들의 목격담을 바탕으로 이를 비밀리에 기록했다. 이 꼼꼼함과 용기는 이 기록이 훗날 전범 처벌 증거로 사용되며 보상받는다. Wild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종전 후 대령으로 진급하여 일본 전범들을 ‘지구 끝까지 쫓아가’ 잡겠다는 열정으로 전범 수사 책임자가 된다.


필리핀에서 전범 재판을 받고 있는 야마시타.


야마시타 심문을 맡으며 Wild는 불과 4년 만에 항복 군 사령관의 통역 장교와 이후 전쟁 포로의 처지에서 전범의 수사관으로 위치가 바뀐다. 야마시타 중장도 싱가포르 전투 이후 전쟁 영웅이 되었지만 도조 수상과의 불편한 관계로 만주로 좌천되었다가 1944년 필리핀 방어전에 투입되어 일본군을 이끌다 종전을 맞이한 굴곡이 있었다. 종전 후 야마시타는 ‘sook ching’ 대학살 외에 1945년 초 필리핀 방어전 중에 발생한 100,000여 명이 넘게 희생된 마닐라의 대학살을 저지른 부대의 사령관으로 재판장에 선다.


1945년 10월 28일 Wild는 야마시타에게 조사대상인 전쟁범죄 사안을 하나하나 직접 따져묻는다. 그리고 Sook ching 대학살 발생을 몰랐다는 야마시타의 증언이 거짓이 아니라고 판단한다. 확증이 없어 지금도 논란으로 남은 sook ching 책임 공방을 판단하는데 Wild가 지니는 무게는 가볍지 않다. 일본의 전쟁 범죄를 밝히는데 필요한 열정과 지식을 모두 겸비한 몇 안되는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야마시타의 전범재판을 주제로 한 저서 "야마시타의 유령"의 저자 Allan Ryan 역시 전범 심문이라는 특수한 상황이라 야마시타의 책임 거부를 곧이 받아들이기 힘들다 지적하지만 결국 Wild가 내린 판단을 쉽게 일축하기 어렵다는 결론을 내린다. 대신 Sook ching 대학살은 야마시타 본인이 아닌 그의 참모였던 쓰지 마사노부가 주도한 것으로 추정한다. 쓰지는 2차 대전중 일본군이 저지른 다양한 전쟁범죄와 삽질에 종종 등장하는 논란의 인물로 당시 일본군 내에서도 악명 높던 자다. 그는 말레이 반도 승리 직후 파견된 필리핀에서 1942년 4월 미군과 필리핀군 포로 76,000명을 120km에 달하는 강제로 행진케 하는 도중에 2만 명이 넘게 사망한 바탄 죽음의 행진에도 깊게 연루돼있다. 다만 직접 명령 여부와 상관없이 야마시타는 Sook ching 대학살(1942)과 마닐라의 대학살 (1945)를 일으킨 부대의 총책임자로서의 책임이 인정되어 교수형을 선고받는다. 1946년 2월에 집행됐다. 


Cyril Wild 전기. 작가인 James Bradley는 Cyril Wild덕에 포로 생활 중 목숨을 건진 인연이 있다.


Cyril Wild은? 인간 승리의 스토리를 써 내려가던 Wild는 그러나 전범 수사관으로 본격적 활약을 하기도 전에 1946년 9월 25일 홍콩에서 비행기 추락으로 사망한다. 혹독한 포로와 부역 생활을 견뎌낸 삶을 허무케 하는 황망한 죽음이었다. 종전 이후 새 질서를 찾지 못하던 복잡하고 어두운 결정이 난무하던 시절에 벌어진 사고다. 홍콩의 사우스모닝포스트지(SCMP)는 Wild가 히로히토 일본 천황과 731부대의 연결고리를 찾다 미국이 비행기 사고로 위장해 제거했다는 의혹을 제기한바 있다 (밑 링크 기사). 사실 여부를 떠나 그의 인생에 평안한 말로를 기원하고 마침내 그 희망이 보이던 순간 내려진 갑작스럽고 잔혹한 맺음이었다...



역사적으로 잘 알려진 인물 삶의 디테일보다 알려지지 않은 인물들 삶의 대강의 궤적이 주는 무게가 클 때가 있다. 격변하는 큰 역사의 흐름 속에서 생존하지 못한 자, 좌절하고 희생된 꽃을 미처 다 피우지 못하고 역사 속에 파묻혀 잊혀진 자들의 드라마만이 줄 수 있는 복잡미묘한 감정 때문이다. 그들을 밀쳐내고 준비한 강의였는데 학기 중에 만난 그들 삶이 남긴 여운이 짙게 남았다. 잊기 전에 짧게 기록해둔다.






 

작가의 이전글 19대 대선 마무리 총평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