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은 담임을 닮아간다고 하던가, 우리 반 아이들은 나를 닮았는지 유독 냄비 같다. 이것저것 끓어올라서 시작하는 건 많은데, 며칠 지나면 차갑게 식어버린다. 옆 반 아이들은 보드게임, 레고 등 놀거리를 놓아두면 진득하게 하던데 우리 반 아이들은 희한하게도 며칠 하다가 팽 던져두고 술래잡기나 하고 논다. 4학년인데 1, 2학년이나 하는 술래잡기를 하고 있으니, 가끔 이 코로나 키즈의 모습이 황당하고 안타깝기도 하다.
모처럼 한가한 점심시간, 아이들이 어김없이 운동장으로 뛰어나가 한적한 교실에 남아있던 말썽꾸러기 남자애들이 내 앞에서 알짱거리길래 말을 붙였다.
“너희 할리갈리 할 줄 알아?”
학기 초부터 가져다 놓았는데 아이들은 할 줄 모르는 건지 도통 건드리지를 않았다. 할리갈리 정도는 규칙도 단순하니, 몰라서 안 하는 거라면 알려주고 같이 해볼까, 하는 심산이었다. 아이들은 내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당연하죠!” 소리치고는 그 자리에서 보란듯이 할리갈리를 하기 시작했다.
마침 반에 딱 적정 인원인 5명이 남아 있었던 터라, 나는 구경꾼을 자처하고 아이들의 플레이를 지켜보기로 했다. 구성은 개중에 나름 브레인인 아이 둘에 다소 산만하고 집중력이 부족한 아이 둘, ADHD가 있는 특수 아동 하나였다. 그래서 브레인 2명 중 하나에게 마음속으로 배팅했다. 다른 아이들에게는 미안하지만 기대도 하지 않았다.
진명이가 카드를 (뒤죽박죽으로) 셔플하고 배분하기 시작했다. 아이고, 그런데 이 녀석 1장씩 나누어주고 있다. 진명이는 ADHD 특수아동치고는 매우 점잖고 깔끔한 편이지만 겁도 많고 느려서 우리 반에서 암묵적으로 깍두기 역할인 아이다. 세상 느린 딜링을 지켜보던 성질 급한 또또가 무언가 항의하려 입을 열었다가 “그래, 진명이 하고 싶은 대로 다 해라.”하고 포기했다.
영겁 같은 딜링 후에 드디어 본격적인 게임이 시작되었다. 바나나 셋, 딸기 둘, 자두 셋, 자두 하나, 라임 둘…. 카드는 점점 쌓여가고, 말 없는 아이들 사이로 긴장감만 흐르던 와중,
뎅 -
청명한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딸기가 다섯이었다.
그런데 이럴 수가, 종을 친 손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진명이었다!
아이들도 놀란 눈으로 진명이를 쳐다봤다.
“뭐야, 진명이?”
주변의 반응에도 진명이는 새침하게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며 카드를 제 쪽으로 쓸어갈 뿐이었다. 이후로도 진명이의 독식 플레이가 이어졌다. 카드를 순식간에 잃어 꼴등을 한 현이가 “선생님, 얘 사기 쳐요! 진명이 완전 타짜예요!”라고 외쳤다.
나는 진명이의 새로운 면을 보게 되었다. 그래, 누구든 잘하는 것이 하나쯤은 있을 수밖에 없는데 교사인 나마저도 진명이의 단편적인 면만 보고 은연중에 깍두기로 여기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도 나름 아이들을 편견 없이 바라본다고 생각했는데, 편협했던 나를 반성하게 되었다.
요새 우리 반은 할리갈리 열풍이다. 이 기세를 몰아 11월 말에 할리갈리 대회를 개최하기로 했다. 진명이가 과연 몇 위를 기록할지 궁금하다. 처음에는 영 잃기만 하던 현이도 며칠 열심히 하더니 이제는 곧잘 따고는 나에게 카드를 흔들며 자랑한다. 현이는 학기 초에는 나를 부담스러워하던 아이였는데, 같이 부대끼며 부쩍 가까워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친구들을 너무 좋아하지만 잘 못 어울려서 걱정이었던 진명이도 함께 웃으며 어울리는 모습이 참 다행스럽기도 했다. 7개월 동안 썩어가던 보드게임의 긍정적인 효과를 톡톡히 경험했다.
그렇게 종소리, 비명 소리, 환호성 소리 등이 마구 뒤섞인 북적북적한 점심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아이들은 옹기종기 모여 머리를 맞대고 세기의 배틀을 했다. 진명이의 폭탄 발언 전까지는. 여느 날처럼 밥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할리갈리 할 준비를 하던 현이에게 양 볼에 밥을 잔뜩 욱여넣은 진명이가 대뜸 저격을 날렸다.
“현이야, 제발 양치 좀 해.”
풉. 진명이는 우리 반에서 정말 흔치 않은 ‘양치하는 남자 어린이’ 중 하나였다. 양치 안 하는 현이랑 머리를 맞대고 게임을 하다가 입 냄새라도 거하게 맡았던 걸까. 할리갈리 덕에 진명이의 새로운 면을 하나 더 발견하게 되었다. 갑자기 훅 들어온 공격에 치명상을 입은 현이는 머리를 감싸고 절규하며, 박장대소하는 나에게 소리쳤다.
“선생님, 저 자퇴할래요!”
그 후로 현이와 진명이가 함께 할리갈리를 하는 일은 없었다.
*이야기에 등장하는 모든 아이들의 이름은 가명입니다.
생각해보면 진명이는 모든 게 느리고 겁이 과도하게 많지만 입가에 거품을 잔뜩 묻혀가며 양치도 잘 하고, 청소도 성실히 하며 맡은 일을 책임감 있게 하는 아이입니다. 진명이를 통해 섣불리 판단하지 않아야 한다는 교훈을 또 얻고 반성하게 되었습니다. 아이들과 함께 저도 성장해나가고 있는 거겠죠?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