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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단편선 Dec 31. 2016

2016년의 나

소제목 같은 거 없다

연말이랍시고, 아무렇게나 주구장창 쓰는 글이다.


우리 가족은 신정에 차례를 지낸다. 그래서 해마다 12월 31일이 되면 친구들은 다 파티니 뭐니 하며 밤새 노는데 나는 집에 일찍 들어간다. 그게 조금 억울해왔으며, 오늘도 조금 억울하다. 어쨌건 구정에는 풀로 놀아버리니 나쁠 건 없다.


2016년 1월 1일에도 차례를 지냈다. 그리고 차례상 치우자마자 짐 챙겨서 충남 태안반도 만리포 해수욕장에 갔다. 개인적인 일 때문에 몸도 마음도 최악이었고, 하지만 작업은 해내야하니까 어디론가 떠나서 혼자 있고 싶었다. 도착하니 밤이었고, 당연하다는 듯 해안가에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인근 숙박업소들도 대부분 닫았는데, 겨우 싸구려 모텔을 하나 섭외해 짐을 풀었다. 라면 하나 소주 한 병 사와 먹고 마시며 단편선과 선원들의 [뿔]에 들어갈 음악들의 악보, 음악표현에 관련된 지시사항, 사운드를 어떻게 구현할 것인가에 대해 죽 써내려갔다. 다음날도 썼고 그 다음날도 썼다. 스튜디오에서 원테이크로 뜬 가녹음을 계속 듣고 계속 썼다. 내 기억엔 한 A4 용지 기준으로 워드 프로세서에서 한 20매 넘게 쓴 것 같다.



돌아온 다음에는 바로 녹음 준비에 들어갔다. 1월 중순부터 4월까지는 녹음하고 믹싱하고 마스터링 하는 이야기 밖에 할 게 없다. 돈도 하나도 안 벌고 그것만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2015년 연말에 한 400만 원 정도 모아놓았는데 작업하면서 생활비 쓰고 또 이리저리 나가는 돈 내다보니 다 탕진하고 거지가 되서 2016년 오늘까지 회복을 못 했고 답 없는 겨울을 맞이하게 되었다.


1월 중순부터 2월 구정 전까지 오디오가이 스튜디오에서 먼저 악기 녹음부터 다 했다. 나는 이 작업을 하면서 내가 얼마나 인성 쓰레기인가 다시금 깨닫게 되었는데, 모든 멤버들의 화를 최소한 한 번 이상 돋구았다. 그렇게 프리 프로덕션 단계에서 준비 또 준비했는데도 막상 스튜디오에선 여전히 모호한 부분들이 있었고 나는 디렉터로서 가능한 좋은 아이디어나 좋은 솔루션을 제공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종종 "바람이 불어오는 것처럼 연주하자"는 식의 모호한 표현을 썼고 그때마다 멤버들은 구현에 힘들어했다. 또 한편으로 종종 화내고 종종 짜증냈다. 반성하는 것도 하루이틀이지, 맨날 반성하면 그것도 병이다. 자고로 동서고금의 예술가들은 맨날 반성하면서 맨날 똑같은 악행을 반복하지 않나? 나는 그냥 내가 너무 괴악한 욕망을 사로잡힌 사람임을 인정하기로 했다. 그리고 반성하는 대신, 이 따위로 서로 간의 스트레스를 증진시키는 방식이 아닌 합리적인 커뮤니케이션 방법을 찾고, 그것을 내게 적용하며, 프리 프로덕션 단계를 더 철저히 준비해 loss를 줄일 것이다. 


보컬 녹음은 구정 끝나고 3월 되기 전까지 상상마당 춘천 스튜디오에서 했다. 이때는 매니저 강진원 형과 둘만 갔는데 남자 두 명이서 한 방에 2주 동안 사는 것 자체가 쉽지 않은 일이었고, 게다가 내가 또 개인사로 멘탈이 개박살 나있던 시기라서 나는 너무 감정적으로 매니저 형에게 의존했다. 그것이 얼마나 고통이었냐면 지금도 매니저 형은 그 때 이야기는 정말로 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또 내가 사람이 엉망인 게, 악기들에 대해서는 그렇게 세세하게 디테일한 사항까지 다 챙기면서 정작 내 보컬을 녹음할 때는 매일 헤맴의 연속이었다. 역시나 종종 싸웠다. 결국 지금 녹음된 것들은 거의 처음 레코딩한 걸 갚아엎고 두 번째 내지는 세 번째로 다시 작업하면서 녹음했던 것들이다. 매니저 형이 보컬 디렉팅 안 해줬으면 도대체 어떻게 완성시켰을까 싶다. 생각해보면 정말 동료들이 아니었으면 어떻게 살았을까 싶다.


최종믹싱 들어가기 전엔 숨s:um의 박지하 씨에게 글로켄슈필을 빌려와서 녹음을 하겠답시고 스튜디오를 하루 전세냈는데, 멤버들은 글로켄슈필이 들어가는 것에 동의하지 않은 상태였다. 어떻게 어떻게 우겨서 했고, 결국은 녹음은 다 했는데 실제로 쓴 건 별로 없었다. 사람이 이런 행동을 하면 안 된다. 결국은 믹싱 하면서도 레코딩 할 때만큼은 아니었지만 또 종종 싸웠다.


싸운 얘기를 쓰다보니 도대체 이렇게 많이 싸워서 얻은 게 뭔가 싶은 생각도 든다. 결국 우리는 그냥 한 장의 앨범을 더 가지게 된 것 뿐인데. 물론 계속 안 좋기만 했던 것은 아니고, 좋은 순간들도 많이 있었다. 가장 좋은 순간들은 어쨌건 그렇게 치고 박고 개고생 한 뒤에 믹싱하는데 '와, 이거다' 싶은 걸 들었을 때였다. 나는 도혁 씨가 "내가 원하는 카혼 소리가 그대로 나왔네요" 우영 씨가 "집에서 다시 들어봤는데 좋네요" 수현 씨가 "바이올린 소리가 잘 되었네요" 진원 형이 "어, 괜찮네" 할 때가 가장 좋았다. 나도 집 가면서 그날 그날 믹싱한 것을 듣고 또 들었다. 너무 잘 안 되서 다 때려치고 싶을 때도 있었고 혼자 너무 좋아서 빨리 사람들한테 들려주고 자랑하고 싶다 생각한 적도 있었다. 나는 관심종자라 사람들이 좋다고 하면 그게 가장 좋았다. 자존감 너무 높은데 너무 낮은 이상한 사람이다.


뮤직비디오 얘기도 잠깐 쓴다. ML 씨랑 회기동 단편선 할 때도 두 편("동행"은 스탭이었고, "이쪽에서 저쪽으로"는 혼자 뚝딱뚝딱 만들었다.)을 작업했고 단편선과 선원들 1집의 "공"도 같이 작업했다. 그리고 "연애"를 이번에 같이 작업했다. "연애"는 명실공히 우리가 낸 모든 음악 중 가장 유명한 곡이 되었다. (공연장에서 연주하면 사람들이 그래도 이건 따라 불러준다.) 그리고 그 공은, 물론 우리가 곡을 잘 만들기도 했겠지만 (부정하기 싫다 이 곡이 좋은 곡이라는 것을) ML 씨가 "연애"를 페미니즘적으로 해석해 좋은 비디오를 만들어준 탓도 크다. 처음 "연애" 가녹음 들려주고 며칠 있다가 컨셉 보내온 걸 보고 화들짝 놀라서 솔직히 '이렇게 해도 될까?' 싶었다. 결론적으론 ML 마음대로 하라고 했다. 다만 '장난스럽게 보이진 않았으면 좋겠다'는 언질만 했다. 어렵고 논쟁적인 주제를 장난스럽게 다루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https://youtu.be/fJ8dAWjwWlE


박수환 씨는 "모든 곳에"를 만들면서 아주 쌩고생을 했다. 수환 씨는 졸업작품과 밀린 일을 마무리 하고, 아주 피곤한 상태에서 바로 작업에 들어가야 했다. 소목장 쌔미의 도움을 받긴 했지만, 수환 씨는 그 세트장을 거의 며칠 간에 걸쳐 혼자 만들었고, 끝난 다음에는 또 며칠 간에 걸쳐 해체했다. "노후 대책 없다"의 이동우 씨랑 ML 씨가 스탭으로 붙고, 또 사진가 박정근 씨가 스틸컷을 찍고 김강인 씨는 전체적인 아트 디렉팅을 하고 이태영 씨는 의상과 메이크업을 챙기고… 아주 정신없이 돌아갔다. 결국은 친구들이 없으면 이런 작업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우리는 언제쯤 그들에게 노동한 만큼의 제 값을 지불할 수 있을까? (그리고 우리는 언제쯤 우리가 노동한 만큼의 제 값을 지불받을 수 있을까?)


https://youtu.be/j1hAszFEuvM


4월 말에 앨범을 냈다. 그리고 쇼케이스를 했다. 쇼케이스 할 때는 기분이 날아갈 것 같이 좋았다. 멤버들 모두 좋은 컨디션이었고, 자율기부로 진행했기 때문에 우리는 뭔가 선물을 준다는 마음을 가지고 연주할 수 있었다. (게다가 돈도 많이 벌어 좋았다. 자율기부인데도 많이 넣어들 주셨다. 감사합니다!) 그런데 다음 날 아침에 깨서는 갑자기 우리가 2집을 낸 밴드가 되었고 나는 서른 한 살이 되었구나 하면서 우울해졌다. 나도 우리도 더 이상 신인이 아니구나! 프리미엄이 끝났구나! 나도 이제 애새끼가 아니구나! 이제는 정말 중견으로서 정정당당하게 음악을 해나가야 하는구나, 그런 부담감이 들었다.


그런 마음에 계속 짓눌렸다. 중간에 영국도 다녀오고, 공연도 많았고, 최삼 씨와의 콜라보레이션 싱글 "날"도 작업했는데 계속 큰 압박감이 느껴졌다. 조급하고 조마조마 했다. 또 그 사이에 자립음악생산조합의 운영위원도 그만 두었다. 2010년에 한받 씨, 그리고 친구들과 함께 만든 조직을, 물론 2015년부터는 전처럼 많이 참여할 수 없었지만 여하간 공식적으론 딱 6년 만에 그만 두게 되었다. 왜냐하면 나는 똥차 같은 게 되기 싫었기 때문이었다. 사람이 낄 때는 껴야하지만 빠질 땐 빠져야한다. 그대로 있으면 일도 제대로 안 하면서 한 마디 씩 툭툭 내뱉는 멍청한 꼰대 같은 게 될 것 같았다. 또 그 시점에 조합을 운영하고 있던 친구들은 나와 공통점도 많았지만 차이점 또한 많았고, 방향에 대해서도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이쯤에서 운영위원 직을 정리하고, 다른 방식으로 내가 생각하는 바를 펼치는 것이 좋겠다 생각했다. (그것은 2017년에는 윤곽이 드러날 것이다.)


https://youtu.be/hTOsx_zm7zk


그런 와중에 6월 끝날 때쯤 내가 상태가 영 아니니 휴가를 달라고 멤버들에게 졸랐다. 마침 7월달에 큰 일정이 없었고, 나는 제주도로 향했다. 서귀포의 도치 게스트 하우스에 딸려있는 조그만 방에서 일주일 정도, 부산에서 또 사나흘, 창원에서 이틀 정도를 보냈다. 책을 읽고 기타를 쳤다. 밤에는 시 읽어주는 방송을 하기도 했다. 그러다보니 마음이 살짝 놓였고, 두 곡 정도를 썼다.


8월에는 음악 페스티벌들에 나갔다. 순서대로 서울인기 페스티벌, 펜타포트 록 페스티벌, 괴산 페스티벌에 다녀왔다. 그것들은 모두 아주 좋았다. 서울인기 페스티벌은 2016년 버젼의 히피 페스티벌 같은 것이었다. 아주 더웠고, 땀으로 가득차 있었고, 하지만 아주 자유분방 했다. 서울인기 페스티벌의 메인 프로그래머 중 한 명인 박다함 씨는 자립음악생산조합을 함께 만들기도 했던 오랜 친구인데, 그가 이런 멋지고 맛탱이 간 축제를 만드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이 자랑스러웠다. 펜타포트 록 페스티벌에선 다들 별 문제없는데 혼자만 잔뜩 쫄아서 연주했다. 사람이 준비를 안 하면 쫄보가 된다. 괴산 페스티벌은 서울인기 페스티벌과는 다른 측면에서 멋지고 맛탱이 간 축제였다. 술 마시고 순대 먹고 춤추고 돌았다. 요새는 맛탱이 간 게 너무 없어서 정말 큰 일이다.


그 와중에 랏도의 밴드뮤직 DJ를 시작했다. 사실 시작했다고 얘기하기 조금 민망한 게, 딱 1달만 하기로 했다. 나는 호기심도 많지만 두려움도 많은 타입이라, 1달 동안 일주일에 두 번 씩 8회 정도는 내가 어떻게든 케어할 수 있는 범위일텐데 그 이상은 무서워서 더 할 수가 없었다. 나는 오래 전부터 전영혁 선생님 같은 간지 나는 방송을 하고 싶었다. 진정성 있게 음악 얘기만 하고 음악만 트는 그런 방송 있지 않은가? 그래서 일주일에 두 번 하는 방송을 준비하기 위해 일주일 내내 음악을 듣고 책 읽고 구글링 하고 이상한 블로그 뒤지고 했다. 그렇게 8번 동안 회별로 크라우트 록, 류이치 사카모토, 신중현 등등 매일매일 특집으로 채웠고 갖은 똑똑한 척은 혼자 다 했다. 결론을 얘기하자면, 일주일에 2시간 씩 두 번 4시간을 혼자 음악 틀고 음악 얘기하고 이러는 것은 인간 할 짓이 못 된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그런 방송을 매일 같이 할 수 있는 것일까. 너무 신기하고 어렵다.


제주에서 쓴 두 곡을 가지고 9월 초까지 계속 합주를 하는데 멤버들이 의욕이 영 없었다. 그러다 어느 날 합주 끝나고 우영 씨가 "솔직히 신곡들이 연주하는데 재미가 없다"고 했다. 그 곡들은 둘 다 발라드였기 때문이다. (물론 딱딱하게 말한 건 아니고 그답게 굉장히 예의바르게 하지만 힘주어서 얘기한 것이다.) 그리고 "연주하는데 재미가 있는 곡을 연주하고 싶다"고 얘기했다. 나는 그 말이 너무 좋았다. 당장 두 곡을 갖다 버렸다. 연주하는 게 재미없다는 데 연주할 필요가 없지 않나? 그리고 와! 우다다다! 하면서 복잡하건 말건 내 맘대로 신곡을 후려갈겨 썼다. 그게 2016년 마지막으로 냈던 싱글 "국가"였다. 하마터면 멍청하고 길기만한 발라드 연주하는 밴드 될 뻔 했는데 이건 정말 우영 씨 덕분에 산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2016년 마지막까지도 우당탕탕 할 수 있었다. 우당탕탕이 늘 최고다. 또 그 사이에 미술가 Hail 씨에게 연락이 와 "거인"의 뮤직비디오도 만들게 되었다. 우리는 엉겁결에 한 해에 5편의 뮤직비디오를 낸 Mtv-프렌들리 밴드가 되버렸지만 Mtv에선 한 번도 틀어주지 않았다…


https://youtu.be/n2qiSwHJPlk

https://youtu.be/pZxDlAj5LyQ


9월부터 11월까지는 제주도에 갔다가, 외국에 나갔다, 들어왔다가, 또 외국에 나갔다, 또 들어왔다가, 제주도에 또 갔다가… 이러다가 결국 병이 나버렸다! 왼발이 완전 아작이 나서 아예 걸을 수가 없었다. 병 때문에 아랍 에미리트 투어도 못 갔다. 투어 출발 이틀 전에 응급실 가서 사경을 헤매다 왔는데 그냥 걷는 거는 고사하고 진통제 없으면 밤에 잠도 못 잘 정도로 고통스러워서 도무지 갈 수가 없었다. 중간에서 매니저 형과 이영찬 씨가 오랫동안 어레인지 했는데… 완전히 망해버렸다. 이 시점부터 내 1년 경제계획도 큰 차질이 빚어지기 시작해 결국 이 글을 쓰는 2016년 12월 31일 시점에는 망한 사람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나는 집에 빌붙어 살기 때문에 죽지는 않을 것이다. 죽지만 않으면 된다. 여하간 거의 한 달을 밖에 나가지도 못 했고, 최순실과 정유라와 우병우와 박근혜와 김기춘과… 그런 인간들의 갖은 깽판이 다 뽀록나 나라가 엉망진창 뒤숭숭하고 맨날 집회시위 할 때도 한 번을 못 갔다. 아파서 곡도 쓸 수가 없었다. 이런 내게 위안이 되었던 것은 영화 "아수라"와 iOS 버젼으로 컨버팅 된 "파이널 판타지 6"과 "드래곤 퀘스트 8" 그리고 넥슨의 "삼국지 조조전" 뿐이었다…


그러다 헉 ??? 하고 12월이 되버렸다. 뭔가 너무 멍청한 상태로 12월을 맞이하게 되었는데, 사실 올해가 특별하게 더 멍청했던 것 뿐이지 늘 멍청하긴 멍청했다… 여하간 싱글 "국가"를 내고 우다다다 발매기념 파티를 하니 헉 ??? 하고 한 해가 끝나버렸던 것이다. 작년 연말에는 무슨 이상한 꿈에 부풀어서 만화를 그리겠다느니 뭐 그런 다짐을 했는데 정말 1도 안 했다. 살기 너무 바쁘고 힘들었다. 나도 이렇게 살기 바쁘고 힘든데 직장인들은 도대체 어떻게 사는 것일까? 인생 너무 힘들다.


그래도 연말에 조금 좋았던 건, 내가 그동안 만든 앨범을 다시 들었는데, 2012년 [백년] 2013년 [처녀] 2014년 [동물] 2016년 [뿔] 하나 같이 나와 동료들이 열심히 만든건데 '와, 정말 맛탱이 간 음악들이다' 뭐 이런 생각이 절로 났다는 점이다. 나는 계속 맛탱이 간 거 만들고 싶다. 그러려면 인간관계에 조금 더 신경을 써야하긴 한다.


2017년 새해다짐은 안 하기로 했다. 2016년 새해다짐 한 것을 보니 도무지 뭘 하겠다고 하는 게 말이 안 되는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이렇게 살다보면 또 2017년이 가겠지… 라는 생각이다. 물론 대충 놀면서 지낼 건 아니고, 일단 곡은 열심히 쓴다. 그것은 내 일이니까. 또 새해 되면 곡 쓴답시고 두 달 정도 강원도에 다녀올 것이다. 제주도도 일 있어서 한 번 가야하고. 전생에 무슨 죄를 지어서 역마살이 끼었나… 그러다가 곡 모이고 하면 또 싱글 내고 앨범 준비하고 그럴 것이다. 나는 공무원 같이 음악하고 싶다. 하루 정해진 시간 그냥 의자에 엉덩이 딱 붙히고 음악 만들고 때 되면 합주하고 쉴 때 책 읽고 영화보고 퇴근해서는 친구들하고 한 잔 하고. 그냥 그렇게 평생 음악하다가 뒈지고 싶다. 나 하나랑 우리 밴드 하나 정도는 그렇게 살아도 하느님이 용서해주실 거라 믿는다. 구약성서에선 최고 존엄 무서운 분이셨던 그가 신약성서부턴 세상없는 대인배 되셨기 때문이다. 랏도의 밴드뮤직에서 라디오 DJ도 다시 한다. 너무 힘들어서 일주일에 1회로 줄였지만. 그 외에도 뭐 하기한 프로젝트들이 있고 나는 열심히 할 것이다. 또 돈 벌 구석을 찾아야 한다. 나도 이제 서른 두 살이다. 뭐 나는 내가 아주 한심한 축에 드는 인간이라고 생각진 않지만 모아놓은 돈이 정말 1도 없다는 것은 서른 두 살로서 조금 충격인 부분…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 달에 50만 원 씩만 저축하는 인간이 되어야 한다. 그래야 나도 인생의 계획이라는 것을 세울 수 있지 않겠는가…


여하간 인간이 바뀌진 않을테니 그냥 이런 인간말종이라는 것을 겸허히 인정하고 대신 말종짓을 안 하기 위해 노력과 준비를 할 것이다. 이런 멍청한 글을 12월 31일에 쓰는 인간이라는 것도 웃기고 정말 인간 노릇하기 힘들다. 올 한해 좋았고 싫었고 기뻤고 화냈다. 2017년에는 좋고 기쁜 것을 늘리고 싫고 화내는 것을 줄일 것이다. 이 긴 글 끝까지 읽는 사람 없겠지만 혹시라도 읽어주셨으면 감사하고 내년에도 잘 부탁드린다. 잘 부탁드릴 수 있도록 나부터 잘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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