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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보일기

#010 이기운의 단련일기

by 단련일기

✣'이기운'의 단련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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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 보 걷기에 처음 도전한 건 <마녀체력>이라는 책을 보고 나서였다. 급격한 체력 저하와 건강염려가 극심할 때쯤 책을 읽었고 ‘걷기라도 해보자’는 마음으로 시작했다. 많은 운동 중에 왜 하필 운동인지 아닌지 알 수 없고 애매한 걷기였냐면 운동에 관한 흑역사를 많이 써 왔기 때문이다. 어렵게 결심해서 운동을 끊고 하루도 가지 않기. 운동 클럽에서 몇 개월 할인을 홍보하고 유인하는 것도 나처럼 등록만 하고 가지 않는 사람이 많기 때문이라는 얘기도 있다. 운동 효과를 생각하면 할인해서 장기 등록하는 건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전략일 것이다. 가기만 하면 말이다.


출퇴근 시간이 규칙적이지 않아, 시간을 내는 게 더욱 어려워진 때라, 다른 운동을 시작하기는 무리였다. 스스로 할 수 있는 게 필요했다. 걷기는 마음만 내면 할 수 있고, 실패하더라도 헛된 돈을 썼다는 자책은 안 할 수 있다. 기분 전환을 할 수 있고, 집에 오면 쉬고 싶은 마음이 먼저지만 결심하는 것만으로 몸을 일으키는 계기가 된다.


매일 걷기는 쉬울까? 당연히 아니다. 일이 있어 꼭 나가야 하는 날에는 그나마 걷지만, 약속이 없는 주말엔 밖으로 나가는 일 자체가 어려웠다. 몸이 가라앉아 바닥과 혼연일체가 되기도 하고, 집에서 해야 할 일이 많기도 하고, 곁에서 같이 뒹굴고 놀아주는 걸 좋아하는 우리 집고양이 '곰이' 때문이기도 하다. 시간표를 짜기도 하고, 계획을 세우며 걸을만한 곳을 구상하기도 하지만, 눕고 싶은 마음이 이기기 일쑤였다.


그럼에도 5월 한 달 동안 하루 만 보 걷기에 도전했다. 걸을까 말까 고민하며, 걷기를 미뤄왔던 시간에는 생각하지 못한 일이 일어났다. 걸으면서 겪었던 작은 변화를 남긴다.

010 이기운 02.jpeg 만 보를 넘기면 폭죽이 터지는 걷기 앱 'pacer'


1) ‘걸어서 출근하기’에 성공했다

출근길은 은평구 응암동에서 중구 정동까지 1시간 30분 거리이다. 이 정도 거리라면 걸을 수 있겠다고 생각만 했었는데, 어차피 걷는 김에 출근길을 걸어 보았다. 두 번을 도전했는데 조금씩 다른 길로 걸으면서 구석구석 동네 길을 익혔다. 산이 많은 동네라 언덕길을 오르락내리락 숨차하며 걸었는데, 천천히 주변을 살필 수 있어 동네와 친숙해졌다.


2) 봄, 봄, 봄을 누렸다

연두와 초록의 기분 좋은 봄 빛깔을 마음껏 바라보았다. 봄을 가장 잘 느낄 방법은 뭐니 뭐니 해도 걷기인 듯하다. 봄날의 햇살과 나뭇잎의 살랑임과 피어나는 꽃들과 시간이 갈수록 짙어져 가는 초록 잎들의 변화를 세심히 느낄 수 있었다.


3) 내 몸과 움직임에 집중했다.

구부정한 자세를 펴게 되고, 다리를 쭉쭉 뻗어 걸으면서 더 힘차고 곧게 걸을 수 있었다. 매일 만 보 걷기는 생각보다 난관이 많았다. 일이 바쁜 날, 비가 오는 날, 저녁 약속이 있는 날, 몸이 안 좋은 날 등 그때그때의 일에 떠밀리지 않으려면 우선순위를 두어야 했다. 바쁜 일상에 걷기에 우선순위를 두는 건 사치스럽게 느껴지기도 했지만, 덕분에 내 몸의 움직임에 중심을 둘 수 있었다.


4) 체력은 늘어난다.

걷기만 해서는 체력에 도움이 안 될 것 같지만 매일 조금씩 달라진다. 매일 걷기를 하는 때와 걷지 않은 때를 비교해보면 차이는 확연하다. 산에 가거나 여행을 하면 더 잘 느껴진다. 발걸음의 가벼움 정도가 다르다. 내 체력이 버티는 정도가 나도 모르게 늘어나고 숨이 가빠지는 정도도 달라져 있다. 걷기 초반에는 하루 만 보를 채우는 것만으로도 지쳤지만, 곧 만 보를 걷고도 더 걸을 수 있는 날이 왔다.


5) 걸어야 걷는다

하지 못한 날들의 괴로움도 있었지만, 만 보를 넘기면 폭죽이 터지는 앱이 있어 작은 즐거움과 성취감을 주었다. 해왔던 날들의 기록을 바라보며 목표를 가진다는 것이 얼마나 방향성을 주는지 생각한다. 걷기에 목표를 두어서 걸을 수 있었다. 무언가를 하기 위해선 매일 조금씩 해나가는 수밖에 없다.


<만 보 걷기 5월 기록>
- 만 보 넘게 걸은 날: 24일
- 거의 걷지 않은 날: 3일
- 아깝게 만 보는 안 된 날: 4일


하루 평균 10,176걸음을 걸었다. 만 보 걷기 도전은 집안에 머무르기 쉬운 나를 밖으로 꺼내 주는 열쇠였다. 걷기 앱의 폭죽 같은 일상의 즐거움이었다. 내 몸을 생각하는 최소한의 장치였다. 새로운 길을 알려주는 지도였다. 봄 향기를 음미하는 풍요로움이었다. 여행 같은 하루를 만들어준 선물이었다. 걷기보다 눕기를 좋아하지만, 오늘도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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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책은 감수성을 훈련하는 것이다.

우리는 걸으면서 창조성의 샘을 가득 채운다.

우리는 새로운 이미지에 주목하고 새로운 관계를 맺는다.

… 산책은 경험이라는 비단 조각을 이어 조각보를 만든다.

그렇다. 걷는다는 것은 정말 중요하다.


- 줄리아 카메론, 「새로운 시작을 위한 아티스트 웨이」



이기운 brunch @gomhouse

살아 움직이는 힘. 스스로 가진 생명력을 잘 살리는 사람이 되고 싶어 ‘기운’이란 이름을 지었습니다. 이름만으로도 ‘기운찬’ 날들을 맞을 준비가 된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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