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평등으로 가는 첫 걸음, 호칭 변화
이번 설이 오기 전, 서울시여성가족재단이 '서울시 성평등 생활사전'을 발표한 덕분에 남녀간의 비대칭적인 단어에 관한 기사들 접하게 되었다. 또한 명절 스트레스로 인해 시가로 내려가지 않은 며느리들이 증가하고 있음을 알게 된 후로부터 익숙하게 사용해왔던 단어들에 의심을 품기 시작했다. 지금이라도 어휘를 변경해야 할 필요성을 알게 돼 다행이라 생각한다. 물론 '이게 맞는 단어인가? 차별적인 말은 아닌가?' 의심하고 고심해 사용하다보니 말하기 전 생각이 많아졌다. 하지만 익숙하다고 해서 계속 고수해야 하는 법은 없으므로 더 낫고 옳은 길을 지향하는 길에 놓인 불가피한 시행착오라고 생각한다.
1. '왜' 양쪽 집안을 달리 부르죠?
남성중심적 가족·호칭체계
잔존 현대사회에 맞게 호칭 변경돼야
기혼남성의 집은 시'댁'이라 하는데 여성의 경우 외'가'라고 부른다.
같은 집인데 왜 한쪽은 높여 부르고 낮추는걸까?
이유는 남성중심적인 가족관계에 따른 호칭체계가 세월이 무색하게 아직도 유지되고 있기 때문이다. 언어는 사유를 반영한다는 말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많은 한글 단어들에 남성 집안을 높여부르는 사고방식이 투영되어 있었다. 의심조차 못했던 단어인 남편의 동생을 가리키는 '도련님'은 '도령+님'이란다. 도령은 총각을 높임말이며 아가씨라는 단어도 지체 높은 가문의 딸을 가리키는 '아씨'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당연히 예상되겠지만, 아내의 동생은 높여부르지 않는다. 처남과 처제일 뿐이다.
호칭 문화가 바뀌어야 하는 이유는 현대 사회는 전과 달라졌음에도 불구하고 언어는 그대로이기 때문이다. "언어가 사고를 지배한다"는 말처럼, 남편의 가족들을 높여 부르는 것은 여성에게 '며느리 도리'에 대한 강박과 '아랫사람'과 같은 의식을 부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요즘은 결혼한다고 해서 시가(시댁)에 들어가 살지 않는다. 분가하는 부부들도 많고 장모가 손주를 보살펴주는 경우도 늘어났다. 사랑하는 남자와 결혼했다는 이유로 여성이 아랫사람이 돼야 할 이유는 없는 것이다.
2. 호칭 변화 움직임은 한국뿐만 아니라 외국에도 존재했다
호칭에 대한 논란이 일기 전부터 나는 우리 나라 호칭체계가 복잡하다고 생각해왔다. 어린 시절 아내가 결혼한 시동생을 '서방님'이라 부른다는 사실을 접했을 땐 충격이었다. 아니, 서방은 남편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던가? 한국인인 나도 '서방님'이 1 남편의 높임말이자 2 시동생을 뜻한다는 걸 찾아보고 나서야 알았으니 재한외국인들이 호칭 문화가 어렵다고 불만을 토로하는 것은 당연했다. 지위 사람 관계에 따라 달리 불러야 함은 참 비효율적인 일이다.
외국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외국의 '이름 문화'가 우리 나라에도 정착해야 한다 생각한다. 옆집 팔순의 할아버지를 '안녕, 탐(Tom)!'이라고 부르는 게 좋은 이유는 첫째는 나이가 권력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사고방식이 마음에 들어서이다. 둘째는 이름으로 부르는 문화가 집단주의인 한국 정서엔 낯선 건 사실이나 훨씬 개인을 존중해주는 느낌이 들어서다. 한국도 '수연이 어머님' '김민수씨의 아들래미'처럼 누군가와 관계있는, 누군가에게 소속된 사람으로 부르지 않고 당사자 개인으로 불러야 개개인을 존중하는 의식들이 자리잡지 않을까? 회사와 지원자가 맞는 지 알아가야 할 입사 면접장에서 결혼과 출산 계획, 남자친구의 유무를 묻는 일이 줄어들테니 말이다. 언어뿐만 아니라 사회 전반에 개인주의가 뿌리를 틀어야 개인으로 존중받는 문화가 자연스러워질 것이다.
물론 호칭에 대한 불편함을 느끼지 못하며 살아온 사람들의 경우 호칭을 바꾸는 일이 유난스럽다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언어사용에 변화가 필요하다는 움직임은 우리나라 뿐만 아니라 '자유와 평등, 박애'를 추구하는 선진국 프랑스에서도 발생했다. 남성(性)이 기본형인 언어 사용에서 벗어나 '성중립 문법 및 철자법'을 지향해야 한다는 것이 주장의 골자다.
대부분의 유럽언어가 그렇듯 프랑스어에도 성(性)을 가진 명사가 존재한다. 쉽게 말해 여성명사와 남성명사가 있다. 우리도 남자 선생님은 '교사'라고 부르는 반면 여자 선생님은 '여교사'라고 지칭하는 경향이 있듯, 프랑스어로 여교사를 표현하기 위해선 남성명사인 professeur에 -e를 붙여야 한다. 보편적으로 여성명사는 기본형인 남성명사에 -e를 붙여 만들어진다. 여성이 남성에 뒤따르는 존재냐고 따져묻는 시각도 일리가 있다.
<언어의 줄다리기> 저자 신지영씨의 말을 인용해보면, 대학생 교수 변호사처럼 각 성별을 아우를 수 있는 공통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꼭 여대생 여교수 여변호사를 쓰는 것은 그 집단에서 여성을 구분해서 보여주고 싶은 사람들의 입김 때문이라고 한다.
성별만 다를 뿐 같은 인간인데 서로를 지칭하는 호칭이 달라야 할까? 신조어들은 잘만 생겨나는데 성차별적인, 성 관념을 띄는 단어들은 유지되어야 할까? 언어는 민족의 규범인지라 쉽게 바뀔 수 없고 변경되는 데까지는 설문조사와 대체어 확정 등의 긴 과정이 소요되는 것은 안다. 하지만 필요하다면 시간을 들여서라도 개선해야 한다. 언어가 사고방식을 결정한다는 말처럼 언어 변경이 성평등한 사회의 첫 걸음이 될 거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