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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단상의 기록 Mar 16. 2024

호사스러운 우동카레콤비

을지로 3가 동경우동

동경우동의 시그니처 메뉴 <우동카레콤비>

박찬일 세프의 <밥 먹다가, 울컥> 출판기념회 신청을 했는데 덜컥 당첨이 되어서 얼마 전 후배를 만나러 다녀왔던 홍대를 다시 가게 되었다. 주말 특히 토요일, 내 차로 운전해서 서울에 다녀오는 건 정말  헬오브 헬이라 웬만하면 대중교통으로 다녀오면 편인데 홍대까지 가장 빠르게 가는 방법을 찾아보니, 우리 집에서 광역버스를 타고 을지로 1가에서 내려 2호선을 타고 가는 방법이라 점심을 일찌감치 을지로 3가 <동경우동>에서 먹기로 기쁜 결심을 하고 버스를 탔다.  


11시 30분 정도 이른 점심시간에 도착한 <동경우동>은 예전부터 혼밥 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가게에 들어서자마자 어렵지 않게 창가 1인석에 앉아 <우동카레콤비>를 호사스럽게 시켰다. 요즘 물가에 7,000원밖에 안 하는 착한 가격의 한 끼지만 나에게 왜 <우동카레콤비>가 호사스러운 메뉴인지를 이야기하려면  26년 전 인 1998년까지 올라가야 한다.


대학교 1학년이었던 IMF가 터져버린 그해 겨울, 남학생이라는 남학생은 모두 군대에 입대를 해야 했고, 군대를 가지 않은 학생들은 휴학을 하고 각자 아르바이트를 찾아 떠나야 했었다. 나도 예외일 수 없어서 휴학을 하고, 그때 당시 서대문구 홍은동에서 살던 막내이모집에서 신세를 지며 알바를 했었다.
당장 무언가 알바를 해야 했기에 이대입구 쪽에서 편집디자인 사무실을 운영하던 당시 터울림 대표였던 용범이형의 제안으로 편집 디자인사무실에서 외장 하드 딜리버리 알바라는 것을 했었다. 지금처럼 웹하드가 일반적이지 않았던 시절이었기에 맥으로 작업한 쿽파일을 커다란 외장하드에 담아 지하철을 타고 을지로 3가에 인쇄소 골목에서 필름 출력을 하고 그 필름을 다시 인쇄소에 전달하는 일을 했었다. 용량이 큰 디지털 파일을 아날로그적으로 옮기는... 지금 생각하면 정말  특이한 알바를 했던 셈이다.


하루 몇 번만 하면 되기 때문에 한 달에 30만 원 정도만 받았다. 다른 알바를 구할 때까지 임시적으로 하는 일이었기 때문에 늘 주머니는 부족하기만 했었다. 그때 자주 들렸던 <동경우동>에서는 2,800원 정도 하는 오뎅우동만이 내가 유일하게 사 먹을 수 있는 가장 만만한 한끼였다. 메뉴판에 끝에 위치한 가장 비싼 메뉴였던 <우동카레콤비>는 그 당시 4000원이었지만, 가난한 대학생에게는 쉽게 선택할 수 없었던 호사스러운 메뉴였었다. 1200원만 더 내면 먹을 수 있었지만, 그때는 정말 쉽지 않은 선택이었다.  ‘언젠가는 <우동카레콤비>를 돈 생각 안 하고 마음껏 시키리라’ 오뎅우동을 먹으며 다짐했던 시절. 나는 그 이후로 녹번동으로 자리를 옮겨 시급 1700원을 받는 밤샘 편의점 알바를 하루 빠짐없이 매일매일 15시간씩 일을 하며 대학등록금을 모았었다. 그렇게 꼬박 한 달을 일해 받은 돈은 70만 원 남짓.. 그래도 <우동카레콤비>는 여전히 호사스러운 메뉴였다.


26년이 지난 지금, 하루 15시간 일하던 편의점도, 외장하드를 들고 을지로 골목을 다닐 일도, 쿽이라는 악명 높은 인쇄용 맥 프로그램도 모두 없어졌지만, <동경우동>은 여전히 그 자리 그대로 있었다.

옛 기억을 되살려 호사스러운 <우동카레콤비>를 시켜서 한입 먹으니, 어찌나 감회가 새롭던지..자스민차가 가득 들어있었던 스뎅 온수통이 냉온정수기로 바뀐 것 말고는 찬으로 내어주는 작은 깍두기, 오이피클, 단무지까지 26년 전 그대로였다. 어릴 때 엄마가 한솥 가득 이것저것 넣고 끓여주면 몇 주는 먹어야 했던 전형적인 노란 카레와 일본 본토 정통스타일과는 거리가 먼 우동을 파는 <동경우동>은 아이러니하게 이름과는 거리가 먼 전형적인 한국형 우동집이지만, 제대로 된 일본 전통 제면 우동을 먹을 때도 나는 늘 마음속 한켠에는 <동경우동>이 크게 자리 잡고 있었다. 그건 아마도 주머니 사정이 넉넉하지 않았던 26년 전 IMF로 휴학을 했어야 했던 가난한 대학생의 속을 2,800원만으로도 든든히 채워줬던 그 시절의 기억 때문일 것이다.


오늘 나는 단돈 7,000원으로 한우등심 부럽지 않은 호사스러움을 가득 채웠다.  <우동카레콤비>로 든든하게 채운 것은 비단 나의 위장만은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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