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일을 신나게, 열심히 하는 기자들을 보면 '내가 맞는 일을 하고 있다'는 신념이 있는 것 같다. 경우에 따라선 '내가 세상을 바꾸는 데 기여하고 있다'는 사명감과 정의감도 엿보인다. 나 역시 기자를 꿈꿀 땐 세상을 좀 더 좋은 곳으로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있었다. 기자가 되고 나니 이 멋진 선언이 과거형이 돼버렸다.
세상을 바꾸는 일 따위에는 관심이 없다는 타성 때문은 아니다. 중요한 일에는 여전히 화내고 흥분하며 공부하고 토론하며 살고 있다. 바뀐 건 무엇이든 확신하기를 망설기에 됐다는 것이다.
A라는 사건의 피해자가 B 사건의 가해자가 되는 상황, 더 심각한 범죄가 더 유명한 범죄에 비해 관심을 받지 못하는 상황, 끈질기고 목소리 큰 사람의 주장이 기사에 한 줄 더 실리는 상황을 보고 있다. 자신이 세상을 보는 관점이 '진실'이라고 믿는 사람들을 자주 만난다. 이런 사람들에게 다른 사람들이 하는 말은 '다른 견해'가 아니라 거짓말이나 '틀린 팩트'가 된다.
기사를 쓸 때 이 모든 상황을 있는 그대로 묘사하기는 힘들다. 그랬다가는 '가장 사실적인 지구본을 만들다 보니 지구만 한 크기로 만들어버리는' 꼴이 될 것이다.
"A사건에서 가해자 B씨가 징역 몇 년을 선고받았는데요, 참고로 B씨의 부친인 C씨는 어려서부터 B씨를 심각하게 폭행해 온 가정폭력 가해자예요. 예전에 뉴스도 나온 적 있어요. 근데 C씨는 주식부자라 한남동에 고급 빌라 두 채를 가지고 있어요. 아 그런데 피해자 D씨는 며칠 전 SNS에 자기 여자친구를 두들겨 팬 데이트 폭력 가해자라고 올라왔던데요, 경찰이 지금 수사를 하고 있대요. 아 맞다 근데 가해자 B씨의 전 애인은 아이돌 E씨예요. 맞아요 그 멤버 왕따시켜서 논란됐던 그 E씨요. 물론 A사건과 관계는 없지만요..."
실제 기사는 "A사건에서 가해자 B씨가 징역 몇 년을 선고받았다. 변호사는 이렇게 말했고 검사는 저렇게 주장했다. 판사는 이러이러하다고 판단했다" 식으로 나간다.
눈 앞에서 재판 상황을 전부 지켜본 내 머릿속에는 수많은 탄식과 깨달음과 안타까움과 분노와 흥미로움이 지나간다. 이 모든 걸 기사에 담아보고 싶지만, 내 역량의 한계와 수십 년간 비슷한 기사를 봐 온 데스크의 필터링과 너무 장황한 기사는 읽지 않는 독자들의 안목에 따라 '쓰던 대로' 쓴다. 오히려 사건과 전혀 관계가 없는 아이돌 E씨를 제목에 쓸 경우 클릭수는 수천 건 더 올라갈 것이다. 이런 걸 회사에선 좋아한다.
가정폭력 피해자들이 자라서 강력범죄를 저지르는 경우, 이들은 어릴 땐 피해자였다가 자라선 가해자가 된다. 언론은 피해자를 지키는 일엔 소극적이어도 가해자를 비난하는 일엔 적극적이다. 가해자가 얼마나 나쁜지를 보도하는 것은 얼핏 정의롭게 보이기도 한다. 이런 나쁜 인간을 사회에서 격리하는 일에 온 힘을 다하면 세상이 좀 더 좋아질거야, 하는 확신을 가지기 쉽다. 물론 가정폭력도 문제이므로 가정폭력 사건이 생기면 가해자인 부모를 열심히 비난한다.
나는 가정폭력 피해자들이 학교에서도 왕따를 당하거나 선생에게서 외면받는 상황을 보면서 자랐다. 그런 친구들이 있다는 걸 분명히 알면서도 가해에 동참하지 않는 것으로 자위하며 분명한 불균형에 눈을 감았다. 그런 부채의식을 가지는 한편, 일부 강력범죄 가해자들이 정신질환이나 불우한 환경을 내세워 감형을 바라는 것에는 또 분노하게 된다. 이 양가적인 감정 속에서 누가 맞고 틀리다는 확신을 가지고 기사를 쓰기가 정말 어렵다.
내가 맞게 쓰고 있다는 확신 없이 기사를 쓰는 일이 쉽지 않다. 확신을 가지고 신나게 일하는 기자는 될 수 없다는 걸 안다. 나는 신나게 일하고 싶었는데 뭘 해도 머리만 복잡해질 뿐 신나지는 않는다. 일을 하면서 신나지가 않는다는 것은 이 일이 내게 어울리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닐지 고민한다. 한편으로 머릿속에 이런 혼란을 끊임없이 선사하는 이 일을 사랑한다. 다만 가끔은 '나는 옳은 일을 하고 있다'는 확신으로 신나게 일하는 것 같은 선배, 후배 기자들을 보면서 부럽다는 생각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