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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하 Feb 28. 2022

글쓰기의 고통과 기쁨

작가들의 글쓰기: 프루스트, 제임스 조이스, 이슬아, 박연준



짜임새 있는 글, 유려한 문장으로 흐르는 글, 숨가뿐 스토리로 압도하는 글... 멋진 글들을 읽다 보면 도대체 어떻게 이런 글을 써 나갈 수 있는 거지라는 감탄과 의문을 동시에 갖는다. 그럴 때는 내 마음 편하라고 손쉬운 결론을 내어 버리던 때도 있었다. "그들에겐 뮤즈가 찾아오거든!"



뮤즈란, 춤과 노래·음악·연극·문학에 능하고, 시인과 예술가들에게 영감과 재능을 불어넣는 예술의 여신을 뜻한다. 고대인들에게 뮤즈는 그 자체가 예술적 영감이나 학문적 재능을 의미하기도 했다. (참고: 네이버 지식백과)



뮤즈는 실제 존재하는 인물로서 예술가들에게 창작의 온기를 불어 넣어주기도 하고, 무형의 것으로서 번쩍하고 떨어지는 듯한 예술적 기운을 지칭하기도 한다. 재능이 있기 때문에 대단한 작품을 만들 수 있었던 거라고 말할 때 뮤즈를 들먹거리는 것이다. 물론 영감을 불러 일으키는 환경이나 인물, 재능이 있을 순 있지만, 뮤즈만으로는 글쓰기가 해결되지는 않는다. 글쓰기도 노동에 가까운 일이기 때문이다. 성실하고 꾸준해야 두터운 책 한 권을 완성할 수 있다.


갈채를 받는 작가들의 글쓰기는 낭만적인 요소보다는 괴롭고 고달픈 요소가 더 많다. 멀리 보면 멋져 보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형편 없는 것 중에 하나가 타인의 삶이기도 하니까. 그것은 비단 작가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운동 선수가 금메달을 따고 1등을 하는 모습은 경이롭고 부럽지만, 그곳까지 도달하는 과정은 그야말로 피, 땀, 눈물로 가득한 것처럼. 예술역시 그 결과가 너무 휘황찬란하기에 그걸 빚어내는 절차들에 어마어마한 고뇌와 직장인과 같은 꾸준함, 어쩌지 못해 마시는 술 등이 함께 한다는 건 까맣게 잊게 된다. 한 면이 화려할수록 한 면은 명암이 짙게 드리워지는 법이다.  



이쯤에서 책 <리추얼>을 소개해 보려고 한다. 작가 메이슨 커리는 예술가들은 어떤 일상을 살기에 위대해지는가를 궁금해했다. 그래서 그들의 습관, 루틴 등을 찾기 시작한 것이 한 권의 책이 되었다. '리추얼'이라는 용어는 '의식'이라는 뜻을 가지는데, 루틴보다 좀더 승격한 표현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매일의 삶에서 나를 만드는 의식적인 행위로 풀이하면 적당할 것 같다.




이 책에서 소개하는 대부분의 작가가 그 중간쯤의 어딘가에 위치한다. 그들은 일상의 작업에 충실하지만 자신의 성장을 확신하지 못하고, 작업이 제대로 진척되지 않아 팽팽한 긴장감이 풀리지 않도록 항상 노심초사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래도 그들 모두 어떻게든 자기만의 시간을 내어 작업을 완성했고, 그런 목적을 이루기 위해 삶을 꾸려간 방법은 무한할 정도로 다양하다. - 리추얼, 서문 中




<리추얼>에는 많은 작가들의 창작의 루틴과 고통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들도 나랑 비슷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게 해서 마음이 편안해지는 한편, 고통과 예술은 어쩌면 탐미적인 시각에서 보면 공존해야 하는 건가 하는 생각도 든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라는 역작을 집필한 마르셀 프루스트의 창작의 과정은 모순 투성이지만, 이렇게 해야만 극치의 작품이 가능하겠구나라는 수긍도 가능해 보인다.



집중하기 힘들 정도로 피곤해지면 프루스트는 카페인 정제를 복용했고, 잠자리에 들 때는 카페인의 효력을 떨어뜨리기 위해 수면제 베로날을 복용했다. 그 때문에 한 친구가 프루스트에게 "자네는 브레이크와 액셀러레이터를 동시에 밟고 있는 거네!"라고 따끔하게 충고하기도 했지만, 프루스트는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소설 집필 과정이 고통스럽기를 바라는 듯했다. 프루스튼 어떤 고통이든 가치가 있으며, 고통이 위대한 예술 작품의 뿌리라고 생각하며,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마지막 권에서는 "한 작가의 작품 수준은 고통이 심장에 파고들었던 깊이에 비례해서, 자분정의 물처럼 높이 치솟는 듯하다"라고 말했다. - 리추얼, 191~192p.



제임스 조이스가 '율리시스'를 완성하는 시간은 총 7년이라고 한다. 그가 율리시스와 함께한 7년을 말하는 대목은 지난하고 길다는 느낌을 단번에 준다. 직업 작가로서의 삶이 프리랜서로서 안락하다는 느낌을 단번에 지울 수 있는 대목일 것 같다.



조이스는 1921년 10월에야 <율리시스>를 완성했다. 집필을 시작한 지 7년 만에 거둔 성과였고, "여덟 번의 질병과, 오스트리아에서 스위스와 이탈리아와 프랑스까지 열아홉 차례나 주소를 옮긴 끝에 이루어낸" 성과였다. 이 모든 것을 종합해서 조이스는 "내 계산이 맞다면 <율리시스>를 쓰는 데만 거의 2만 시간을 쏟아부었다"라고 말했다. - 리추얼, 216p.



고통을 달고 살고 오랜 시간을 고뇌해야 하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글을 쓴다는 것은 일종의 행복한 족쇄처럼 그들에겐 숙명이 아닐까 생각했다. 예전에 이슬아 작가의 온라인 강연을 들은 적이 있었다. 글쓰기와 관련된 강연이었는데, 질의응답 시간이 주어졌고, 작가에게 나는 이렇게 물어봤다.



"글쓰기는 하나를 응시하는 거라 힘들다는 생각이 들어요. 차라리 생각을 안 하는 게 속편한 것 같은데, 고통을 느끼진 않은지 궁금해요."



"본인은 게으른 사람이라 글쓰기라도 했기 때문에 들여다 볼 수 있었던 것 같다."라고 그녀는 대답했다. 이슬아 작가는 글쓰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라 힘든 것보다 즐거움이 더 큰 게 아닐까 생각했다. 이슬아 작가에게도 글쓰기는 어쩌면 운명, 쓰는 것은 힘들지만 쓰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아니었을까.



내가 좋아하는 시인 박연준은 글쓰기를 이렇게 표현했.



글쓰기는 일종의 가학 행위이자 어둠을 더듬는 행위다. 어둠 속에서 벌어지는 조심스러운 애무다. 격정과 흔들림으로 어둠이 환하게 벗겨졌을 때 쓰는 자는 비로소 능동적인 애무와 페티시, 사경을 넘다드는 황홀을 겪는다. 호흡과 리듬과 어둠이 삼위일체가 되어 서로 충분히 상피 붙었다고 생각하는 순간, 쓰는 사람은 마침표 위에 사정할 수 있다. 제대로 '쪼그라들' 수 있다. - 소란, 136p.



성실하게 언어 예술을 만끽하고 싶은 사람들, 기꺼이 고통을 감내하겠다는 사람들이라면, 글쓸 준비가 되어 있는 셈이다. 고통 너머에 존재하는 엄청난 쾌락이 다가올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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