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수궁 현대미술관(MMCA)_미술이 문학을 만났을 때
박태원을 아시나요?
근현대 작가며 월북작가인 박태원은 봉준호 감독의 외할아버지로 더 유명하다. 지금의 봉준호 감독만큼이나 세련된 감성의 소유자이며 당대 유명 작가 대열에서 활동했던 꽤 잘나가는 작가였다. 봉준호의 능력을 유전으로만 치부할 순 없지만 어쨌든 할아버지도 대단했으니 따로 놓고 이야기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지금 덕수궁 현대미술관에서는 박태원을 비롯한 근현대 작가와 화가의 글과 그림들이 전시돼 있다. ‘미술이 문학을 만났을 때’라는 타이틀로, 매우 유익하고 재밌는 전시다. 5월 30일까지 전시되니, 텍스트와 시각 예술의 조화가 궁금하다면 꼭 가보기를 권한다.
박태원의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출판본이 전시돼 있어서 신기했다. 늘 글로 만나다가 이렇게 그것이 담긴 책의 실물을 보다니 흥미가 돋았다. 소설의 ‘구보’는 박태원의 아바타 같은 인물로 본인과 허구의 인물이 교묘히 교차된 존재다. (박태원의 호는 구보 혹은 몽보라고 한다.)
박태원의 결혼식이 열리던 날, 방명록에는 지금도 그 이름 유명한 엄청난 예술가들이 축하 메세지를 남겨 놓았다.
구보로 추정되는 인물이 그려져 있는 방명록. 왼쪽 오른쪽이 전, 후라고 하는데 결혼 후에 구보는 앞머리를 가린 스타일이 아닌 비쭉 세운 머리를 하게 된다는 걸까. 방명록 내용을 사진으로 담아 옆에 패드에 슬라이드쇼처럼 보여주고 있다. 예술가들의 결혼 축하 메세지는 멋스러워서 계속 쳐다 보았다.
소설로서만 만나다가 사적으로 만난 것 같아서 설레기도 했다. 심쿵같은 느낌이랄까요. 대단한 예술가들이 직접 적어넣은 글과 그림으로 그때의 그들을 만나는 것 같아 생생함도 크고 말이다.
앗, 이태준! 대학 때 이태준의 ‘가마귀’에 대한 보고서를 썼기에 그를 확실히 기억한다. 그가 쓴 축사는 심플하고 귀엽다. ‘1+1=1’ 구보와 신부가 하나된 날을 축복하는 공식. 옆에 그려진 깨알같은 꽃은 설레는 날을 표현한 것일까.
이태준은 성북동에 살았는데, 아직도 그의 집이 남아있다. 지금은 ‘수연산방’이라는 찻집으로 운영되고 있다.
약간 그로테스크한 감이 없지 않은데, 좋은 의미를 담았으려니 추측해본다. 구보가 인어공주 같은 신부를 낚은 것인가? 그런데 굳이 낚시 바늘을 꿰어서? 알 수 없지만 뭐 이런 그림도 방명록에 담겨 있어 이색적이었다.
시인 김기림은 비평가로서도 활동를 많이 했다. 구보의 결혼에 불어로 멋지게 작성한 ‘Bon Voyage!’ 그의 결혼을 여행의 시작으로서 축복을 하고 있다.
그리고 정지용 시인의 축사. 방명록에 시를 써놓다니... 이건 정말 멋지잖아. ‘태화’라는 제목으로 구보의 결혼을 꽤 단단하게 축복해주고 있다.
꽃 피었으니/열매 열고/뿌리는 다시/깊히!
정성들여 썼지만 명필이 아닌 것 같아 귀여운 느낌마저 드는 필체. 뭐, 정지용이잖아요. 네임밸류에서 이미 다 좋아버리는 거죠뭐.
잠시 정지용의 시 ‘호수1’ 소개해 본다. 보고 싶은 마음을 표현하는 시인의 감각은 대단하며, 행마다 다섯 글자로 맞춰 소리 내어 읽으면 리듬감도 느껴진다.
얼굴 하나야
손바닥 둘로
폭 가리지만,
보고 싶은 마음
호수만하니
눈감을 밖에
보고 싶은 마음을 너비로 표현하면서도 그리운 대상에 대한 금할 길 없는 애틋한 마음이 가득 담겨 있다. 그저 보고싶다 꺼이꺼이 이렇게 직설적으로 표현하지 않아도 압축적으로 담아내는 것, 시인의 기품인 것이다.
다시 박태원으로 돌아오면, 그는 글뿐 아니라 그림에도 탁월했던 것 같다. 그림 실력을 넘어선 센스가 대단하다. 당시 소설은 단행본 형태보다 신문이나 잡지에 많이 연재되었던 것 같다. 지금과 달리 그림도 어우러져서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박태원의 그림은 그 구도나 표현 방식이 지금 봐도 세련된 느낌이 있다. 이런 모던한 남자가 북한에서는 어떤 작품을 썼을까 싶다. 자발적인 월북이 아닌 전쟁으로 인해 어쩌다 북에 남게 되었으며, 그곳에서 대접도 잘 받았다고는 하지만... 못내 아쉬운 마음이 든다.
셀럽들이 작성해 놓은 결혼 방명록은 풍속 자료로서 가치가 있다고 하는데, 대단한 문인과 예술가들의 사적인 기록을 보는 듯해 막 설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