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못 배달되지 않은 사랑이 과연 있을까
이런 곳에도 집이 있었군요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들고
호주머니 속 언 손을 꺼내면
비로소 시작되는 이야기
손금이 뒤섞이는 줄도 모르고
- ‘불이 있었다’ 일부 -
하나의 문구가 마음에 다가와 한 권을 맞이해 버린 시집. ‘손금이 뒤섞이는 줄도 모르고’ 그냥 이 한 문구였다. 손을 잡거나 불 위에 언 손을 쬐다보면 내 손과 다른 이의 손금이 섞인다는 표현이 로맨틱했다. 그렇담 손을 잡으면? 너와 나의 손금은 포개어지고 뒤섞이겠지. 단독의 손이 누군가의 손을 만나 운명의 길이라고 불리는 손금과 만나면 이제 나는 오롯이 나는 아닌 것이다.
이 시집을 샀을 때만 해도 봄 초입이었다. 유난히 쌀쌀했던 봄이었던지라, 여름이라는 제목에 어색함이 감돌았는데 벌써 초여름의 햇볕이 진하다. 어느새 여름이고 여름 언덕에 오를 수 있는 날이 되었다. 물론 으레 기대하는 여름의 청량함과 넘칠듯하게 차오르는 열기를 담은 시는 아니었다.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같은 이탈리아 별장의 여름이라든가 지중해의 선명한 햇빛과 과일의 단향을 기대했던 건 나의 오버스러움이었지.
(선입견일 수도 있지만) 시인은 묵직한 시선을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미와 추를 두루 섭렵해야 시라는 엄청난 걸 쓸 수 있고, 무디거나 대충 생각하지 않으니 아름다움만 보이진 않을 거라고. 이 시집역시 그래서 환희의 여름보다는 나즈막하게 소리가 나는 하얀 겨울의 찬 기운을 담아내고 있다. 죽음이나 슬픔이란 직접적인 낱말도 자주 등장하기도 하고 방황하거나 뜬눈으로 지새우는 사람들에게 위로를 건네는 느낌도 나고.
그간의 시집은 내게는 어렵거나 혼미함을 안겨 주었는데, 안희연 시집은 초짜인 나도 어느 정도 읽기가 가능한 '친절한' 시였다. 쉽다라는 의미가 아니라, 개인의 깊은 세상과 창밖의 타인에게도 손을 내밀어 줄줄 아는 시랄까. 아니 그저 시인과 내가 어느 정도 조응과 소통이 가능했다라는 게 맞을지도 모르겠다.
그의 시에는 어느 정도의 서사가 있다. 산문적이며 사건과 장면이 명징한 편이다. 그 가운데 시를 읽으니 그려지는 모양새에 움직임이 느껴진다. 대화체도 제법 들어가 있다.
더불어 익히 알고 있는 낱말이 제목으로 꼿꼿하게 서 있고 행과 연 안에서 그 의미를 찾게 한다. 그 낱말을 제대로 알고 있었을까 의문이 들 정도로 멍해져 버린다. ‘과녁’이라는 제목을 보고 양궁 선수들의 과녁을떠올리며 생경함으로 그 낱말의 뜻을 곱씹었다. 낱말과 문구, 문장을 여러 번 느끼게 하는 데 시의 매력이 있다는 걸 새삼 또 느낀다.
수신인을 알 수 없는 상자가 배달되었다
상자를 열어보려고 하자 그는 만류했다 열어본다는 것은 책임지겠다는 뜻이라고
우리는 상자를 앞에 두고 잠시 생각해 보기로 했다
그때 상자가 움직였다 생명이라면 문제는 더 심각했다 누군가에게 영원히 되돌아갈 집이 된다는 것은
원치않는 방향으로 자라나는 이파리들을 날마다 햇빛 쪽으로 끌어다놓은 스스로를 상상했다 기대하고 실망하는 모든 일이 저 작은 상자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다
생각은 영혼을 갉아먹는 벌레 같았다 작고 하얀 벌레는 순식간에 불어나 온 마음을 점령했다 상자가 움직일 때마다 우리의 하루도 조금씩 휘청거렸고
고작 상자일 뿐이었다면 쉽게 버렸을 것이다
그런데 말이야, 잘못 배달되지 않은 사랑이 과연 있을까 더구나 생명이라면
너는 상자 앞으로 성큼 다가섰다 나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물을 마시지만 물을 침범하지 않는 사랑을 알고 싶었다
- 측량 -
‘잘못 배달되지 않은 사랑이 과연 있을까’ 역으로 말하면 오배송의 사랑은 없고(필연이든 우연이든 상관없이 온 것이라면 무엇이든 사랑), 재고 따지는 측량으로 어느 정도는 오케이 그렇지 않으면 낫 오케이도 적용될 수 없다는 것. 사랑에 잘못이란 없는 거라는 게 가슴을 조금 뜨겁게 했다.
시는 언어를 갈고 닦는 작업이니만큼 한 권을 다 읽어도 읽었다고 보기 어려운 장르다. 여러 번 다시 음미해야만, 계속 보아야만 의미가 더욱 응축되는 것 같다. 사골 국물 같은 뭐 그런. 오래간만에 낱말, 문구 하나하나를 또렷하게 읽었던 것 같다. 소리가 들렸고 눈에 그려졌고 마음이 커다래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