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읽은 식물과 나무 책들
식물과 나무가 참 좋아지는 나이가 되었나 보다. 작년 초, 생명과 생장이 고스란히 담긴 그들의 모습이 궁금해 책을 찾기도 하고 꽃시장에도 드나들었다.
그러다 내게로 온 식물들. 유칼립투스, 로즈마리 등 작고 소담한 화분들을 알음알음 가져왔지만, 내 방에 식물을 놓아둘 공간은 협소했고 햇빛이 닿지 않는 곳에서 얼마간 살다가 잎은 바싹 말라 버렸다. 물론 물을 많이 주고 햇빛 잘 보여준다고 무럭무럭 자라는 건 아니다. 기르기 수월한 식물들이더라도 온정을 쏟아야만 그러니까 그에 알맞은 수분, 빛, 온도를 챙겨주어야 한다.
그러므로 도무지 기르기 어렵다면, 초록에 좀더 쉽게 다가갈 수 있는 방법은 있다. 산책을 통해 자연 안에 들어가거나 책을 읽는 것이 아직 준비되지 않은 사람에게는 더 좋지 않을까.
식물과 나무에 관한 책 세 권을 소개해 보고 싶다. 건강해지는 느낌이 드는 생명의 기록이라, 지친 느낌이 든다면 기운을 불러 일으켜 줄 책인 것 같다.
아무튼, 식물 / 임이랑
이 책의 표지 사진은 저자가 찍은 사진. "그들에게 내가 꼭 필요하다는 기분이 소중하다"라는 글귀와 함께 디온 에둘레라는 식물이 빛에 어우러진 모습이 참 예쁘다.
식물 하나하나 포커스를 맞췄다기 보다 나와 식물이 어떻게 공존하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편한 글이다. 글은 편한데 식물을 잘 생장시키며 키우는 일은 어렵다. 흙, 바람, 물, 햇빛을 조절하고 날씨를 꼼꼼히 살펴야 하기에 반려동물을 키우는 것과 비슷한 정도의 사랑과 온정을 전해주어야 한다.
무엇보다도 식물이 전해주는 건강한 기운이 작가의 집 이곳저곳을 가득채운 식물과 영위해야 하는 이유가 되지 않을까 싶다. 내 방에는 무엇이 있을까. 스트레스의 분출로 막무가내로 소비한 흔적들이 얼마 안 되는 공간을 숨막히게 채우고 있으니 나에게 도통 건강한 기운이란 건 어디에서 얻을 수 있을까.
식물을 키우는 행위가 요새는 젊은이들 사이에 힙하게 어쩌면 고급진 취미처럼 보이고 있는 것 같다. 몬스테라, 아이비, 보스턴 고사리, 칼라데아 오르비폴리아... 식물의 이름을 듣고 있노라면 이국적이면서도 그럴듯해 보이는 뭔가가 있다. 그래서 저는 식물을 키워요, 물을 주고 지긋이 바라보면 기분이 좋아져요 등등의 말들이 고상해 보이지만, 작가의 식물 키우기는 죽이지 않기 위한 고군분투였다.
나는 나무에게 인생을 배웠다 / 우종영
병든 나무를 살리는 나무의사가 나무를 통해 삶의 메세지를 전해준다. 나무와 가까이 지내며 나무에게서 그야말로 인생을 배운 저자의 이야기다.
나무의 세계는 내게는 미지의 세계였다. 일반적으로 아는 것 이상을 알고 싶은 욕심이 났다. 무엇보다 나무의 이름이 마음에 든다. 그 어떤 낱말이나 문장도 나무 이름이 울려퍼지면 맥을 못 추지 않을까 싶게 아름답거나 소담한 이름이 많다. 이름도 태도도 향기도 소리도 색도 마음에 들지 않을리 없는 것이다.
나무는 참 수동적이면서도 개척적으로 살아가는 존재였다. 태어난 곳에서 뿌리를 내리고 햇볕과 자양분을 받으며 위로 옆으로 몸을 불리며 사계절을 살아나간다. 여기가 마음에 안 들면 저리로 가기도 하는 인간과는 다르게 자기가 뿌린 내린 곳에서 잘 살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나무에게 포기란 없어 보인다.
나이테가 켜켜히 둘러진 100년을 넘게 산 아름드리 나무는 과연 인생을 알려주는 존재이며, 뿌리 내리는 데에만 5년을 소요하는 나무는 흔들림과 자람을 위한 내공을 쌓기도 한다. 자라면서 디귿이나 기역처럼 휘어버린 나무들도 제각각 사연이 있다. 그렇게 자라는 것이 나무로서는 최선이고, 현재에 가장 적합한 방식의 삶을 사는 나무로부터 먼 미래 나중을 생각함이 큰 의미가 없는지를 말해주기도 한다.
나무는 내일을 걱정하느라 오늘을 망치지 않는다
나무는 늘 변함없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주변 환경 변화에 가장 민감한 생명체다. 움직일 수 없는 탓에 환경의 영향이 절대적이고, 생존하려면 주변의 아주 작은 변화에도 재빨리 대응해야 한다. 말 그대로 나무의 삶은 선택의 연속인 셈이다. 해를 향해 뻗도록 프로그래밍 되어 있는 우듬지의 끝은 배의 돛대 꼭대기에서 주변을 감지하는 선원과 같다. - 17p.
천수천형. 천 가지 나무에 천 가지 모양이 있다는 뜻이다. 한 그루의 나무가 가진 유일무이한 모양새는 매 순간을 생의 마지막처럼 최선을 다한 노력의 결과다. 수억 년 전부터 지금까지 나무의 선택은 늘 '오늘'이었다. - 21p.
막 싹을 틔운 나무가 성장을 마다하는 이유
면적만 놓고 보면 세상에서 가장 큰 나무는 미국 세쿼이아 국립공원에 있는 제너럴 셔먼 트리다. 지름 11미터에 높이 84미터 되는 거구의 몸을 자랑한다. 하지만 아무리 큰 나무라도 작은 씨앗에서 시작되고, 싹이 튼다 해도 몇 해 동안은 자랄 수 없다.
막 싹을 틔운 어린 나무가 생장을 마다하는 이유는 땅속의 뿌리 때문이다. 작은 잎에서 만들어 낸 소량의 영양분을 자라는 데 쓰지 않고 오직 뿌리를 키우는 데 쓴다. 눈에 보이는 생장보다는 자기 안의 힘을 다지는 데 집중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어떤 고난이 닥쳐도 살아남을 수 있는 힘을 비축하는 시기, 뿌리에 온 힘을 쏟는 어린 시절을 '유형기'라고 한다. (중략) 나무마다 다르지만 그렇게 보내는 유형기가 평균 잡아 5년. 나무는 유형기를 거친 후에야 비로소 하늘을 향해 줄기를 뻗기 시작한다. 짧지 않은 시간 뿌리에 힘을 쏟은 덕분에 세찬 바람과 폭우에도 굳건히 버틸 수 있는 성목으로 거듭나는 것이다. -32p.
살다 보면 어떻게든 버텨야 하는 순간들이 찾아온다.
정호승 시인은 견딤이 쓰임을 결정한다고 했다. 그러고 보면 사람이나 나무나 삶을 제대로 살아내는 과정에는 오로지 버텨내야 하는 순간이 있는 듯하다. -59p.
어떻게 살 것인가
이렇듯 우듬지가 구심점 노릇을 해 주어서 나무는 자리는 동안 일정한 수형을 유지할 수 있다. 특히 전나무나 메타세쿼이아 같은 침엽수들이 원추형으로 길고 곧게 자랄 수 있는 것은 줄기 꼭대기의 우듬지가 아래 가지들을 강한 힘으로 통솔하기 때문이다. 사람의 인생에 비유하자면 꿈이나 희망이랄까. 나무의 우듬지가 아래 가지들을 다스려 가면서 하늘을 향해 뻗어 가듯, 사람은 꿈이나 희망 등 살아갈 이유가 있어야만 삶의 크고 작은 문제들을 이겨 내며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 84p.
세상에 함부로 대해도 좋을 존재란 없다
숲이 조금씩 틀을 갖추면 가시덤불은 큰키나무들에게 자기 자리를 내주고 다른 불모지로 이사를 간다. 마치 공사장의 가림막처럼 말이다. 건물이 완성되면 가림막을 걷어 내 짠 하고 새로운 모습을 보여 주듯 곶자왈의 가시덤불들도 그러하다. 그래서 가시를 단 나무들이 없는 숲은 그만큼 성숙했음을 의미한다.
척박한 땅을 개척하고 작은 생명들이 자랄 때까지 수호자 역할을 하는 그들을 가리켜 숲의 옷, 곧 임의(林衣)라고 한다. 나무와 숲과 관련한 여러 생태적 이름 중에 내가 가장 좋아하는 단어다. 하늘을 향해 여봐란듯 가지를 뻗는 거대한 큰키나무들도 멋있지만 볼품없는 모양새여도 한결같은 푸르름으로 묵묵히 제 소임을 다하는 가시를 단 나무들의 투박한 이파리가 훨씬 정겹고 아늑하다. 누구도 다가설 수 없을 만큼 무성한 가시덤불이 있기에 그 안의 나무들이 보호 받으며 무럭무럭 자라고, 작고 연약한 새들도 천적으로부터 안전하게 둥지를 틀 수 있는 것이다. - 125~126p.
아직 껍질이 채 생기지 않은 여린 나무 뿌리 끝에는 흙을 파고들 때 상처가 나지 않도록 보호해주는 뿌리골무라는 조직이 있다. 단단한 바위를 부지불식간에 갈라 버리는 것이 바로 이 뿌리골무다. (중략) 뿌리골무가 내뿜는 점액질은 거친 흙을 부드럽게 만들 뿐아니라 주변의 수많은 미생물까지 먹여 살린다. 옥수수 뿌리의 점액질 1그램에는 무려 100억 마리 이상의 세균이 충분히 먹고 살 수 있는 영양물질이 들어있다. 그래서 나무뿌리로 인해 수많은 생명체가 함께 살아가는 공존의 공간이 된다. 이렇게 만들어진 생명의 순환고리는 단단한 바위로 스며들어 바위를 부식시키며 작은 틈새를 만들어 낸다. 처음엔 눈에 보이지 않는 틈새에 작은 미생물들이 조금씩 들어가 살게 되고, 그 부드러워진 공간으로 뿌리가 뻗어 나가니 아무리 단단한 바위도 결국 갈라지고 마는 것이다. - 127~128p.
식물의 책/이소영
세밀화가 그려져 있는 예쁜 책이다. 식물세밀화가이자 원예학 전공자인 이소영이 그린 도시식물이야기로, 다양한 식물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있다. 세밀화가를 그리면서 식물을 연구했을 작가는 사라져가는 식물에 대한 안타까움도 내비친다. 가벼우면서도 가볍지 않은 책이랄까.
우리가 제대로 몰랐던 것들도 알려주어 흥미도 높다. 더불어 예쁘고 고운 세밀화가 잔뜩 담겨 있어 봄에 읽기 참 좋은 책이다.
향기가 나는 이유
식물을 느끼는 가장 보편적인 방법은 바로 후각을 이용한 것일 겁니다. 꽃을 보면 자연스레 코를 대고 냄새를 맡곤 하잖아요. 허브식물은 그 냄새 때문에 사람들이 더 많이 찾고요. 화백이나 편백 같은 바늘잎나무에서 나는 냄새도 많이들 좋아하죠. 식물에서 냄새가 나는 건 휘발성 유기화학 혼합물을 식물이 배출하기 때문인데요. 그 혼합물의 구성 성분에 따라 각각 다른 냄새가 나요. 식물은 기본적으로는 번식을 목적으로 냄새를 풍깁니다. 스스로 움직이지 못하므로 동물을 불러들이기 위해 그들이 좋아하는 냄새를 뿜는 거죠. 간혹 식물에 따라 열매나 앞에 독성이 있는 냄새를 풍길 때도 있지만요. 43p.
자기 생의 필요를 위해서 움직이는 모습이 대단하다. 번식을 위해서 동물이 좋아하는 냄새를 뿜는 모습은 방향이 확실해서 좋고, 의지가 투철해서 좋다. 내 삶에 뚜렷한 것이 있는가, 냄새를 풍기는 행위를 통해서 달성하고 싶은 것이 있을까.
가을잎에 단풍이 물드는 이유
잎이 초록색을 띠는 건 엽록소 때문이에요. 여름에는 뜨거운 태양 아래 광합성량이 늘어나 엽록소 양이 많아지면서 잎의 빛깔이 진한 녹색이 되는 거고요. 그러다가 기온이 낮아지고 낮의 길이가 짧아지는 가을로 접어들면서 광합성량이 줄고, 나무가 엽록소 생산을 점점 멈추게 되면서 엽록소에 가려졌던 색소 분자들이 비로소 그 색을 드러내게 됩니다. 빨간색이나 노란색, 주황색을 띠는 분자들, 안토시아닌이나 타닌, 카로티노이드, 크산토필 등으로 인해 잎의 빛깔이 바뀌죠. 그것이 단풍이고요. 177p.
계절마다 달라지는 나무는 모습을 바꾼다. 싱싱한 초록잎의 계절을 지나 잎이 물드는 가을이 오고 그런 잎들을 떨구는 앙상한 나무의 겨울이 온다. 나무와 계절의 변화를 은유적으로 느끼다가도 엽록소라든가 안토시아닌이라는 용어가 등장하니 꽤 이성적이 돼 버린다. 나무의 비밀을 알아가는 내밀함은 과학에서 더 느껴지는 것 같달까.
봄이 성큼 다가왔으니, 자연과 나무, 꽃, 식물에 대한 이야기를 읽기에 너무나도 좋을 것 같다. 계절마다 어울리는 책들이 있으니, 봄에는 통통 튀는 밝은 느낌과 생장의 기운, 따듯한 햇살의 노곤함이 어울리는 책들로 쌓아 올리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