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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하 Mar 15. 2021

시와 산책(Poetry and Walks)/한정원

시를 좋아하는 작가가 고르고 고른 고운 말의 결들


포에트리  웍스. 시와 산책. 너무나 예쁜 말들이 모인 제목이라  고민 없이 장바구니에 담았다. 시는  몰라도 산책은 좋아하니까 뭐든 비벼볼  있지 않을까 싶기도 했고. '' '산책' 좋아하는 저자가  둘에 대한 것을 담은 글인  알았는데, 왠지 'Walk With Poetry'같은 느낌이랄까. 뭐든  괜찮긴 하겠지만.


작가의 짧은 산문들이 내가 모르는 이국의 시인들 시와 어우려져  자체가 시처럼 읽히고 느껴지고 곱씹어졌다. ‘섬에 있는 서점  따옴표 구어체와 서사에 빠져 있었던 직후라, 굉장히 섬세하고 감수성 짙은  책에 적응이 어렵기도 했다. 새해라  그랬는지 밝고 기운찬 글을 읽고 싶었던  같다. (온몸으로 사색하기 좋은, 감성이 풍부한 작품을 아니 좋아하는 것은 아니지만) 읽다 보니 어느새 적응하면서 작가의 고르고 고른 낱말과 문장에 감성이 그득그득해졌다.






책 표지는 코팅이 들어가지 않은 빳빳한 질감인데, 그래서 처음 살 때는 비닐로 한 번 더 포장이 되어있다. 글의 성격에 알맞은 가뿐한 표지지만, 비닐을 벗겨내어 읽다보면 금세 때가 타고 주름이 잡힌다. 본문 글꼴은 글과 잘 어울렸고, 인용한 글은 부드러운 파란색이어서 깔끔하다.





강은 지나가지만

바다는 지나가고도 머문다.

바로 이렇게 변함없으면서도

덧없이 사랑해야 한다.

나는 바다와 결혼한다.

- 알베르 카뮈, '결혼, 여름'




저자는 <바다에서 바다까지>에서 까뮈의 글을 인용했다. 바다에 대한 표현인데, 읽다 보니 바다에 가고 싶었다. 뭍에 사는 사람들에게 바다는 마음을 부풀게 하고 일렁이게 한다. 철썩철썩 왔다가 돌아가는 파도의 규칙적인 리듬감을 느끼다 보면 복잡한 마음도 정리되곤 했었다. 같은 물이더라도 강과 바다가 주는 느낌은 확실히 다르다. 강은 흘러가고, 바다는 들어왔다 나가고 다시 들어왔다 나가며 반복한다.


살다보면 강을 바라볼 때가, 바다를 그릴 때가 제각각 있게 마련이다. 흘러가게 두어야 하는 것이 있고, 차오르고 빠져나가는 과정을 통해 정리되어야 할 것도 있을 테니까.






예전에 누군가에게 '너는 좀 무거운 것 같다. 그래서 쉽지 않다'라는 뉘앙스의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무겁다는 게 뭘까. 가볍고 싶지는 않았기에 무거운 쪽을 선호했고, 그 무거움이 상대에게 부담이 되었을까. 대략은 알 것 같기도 또 대략은 잘 모르겠는 말이다. 확실히 지금은 가벼운 사람이기를 바란다. 무겁게 사는 것이 이제 덜 재밌어져 버렸기 때문이다.


다음은 '회색의 힘'의 한 부분이다.



침잠은 표면적인 것과 멀어지므로 필연적으로 깊이를 얻는다(그것은 힘이 될 수 있다). 그런데 동시에 무게도 얻는다. 내가 무게를 느낄 때를 곰곰이 따져보면, 거기에는 늘 지나친 자애와 자만이 숨어 있었다. 나를 크게 만들려고 하다 보니 우울해지는 것이다. 마음이 가라앉을 때, 나의 느낌이나 존재를 스스로 부풀리고 싶어하지 않는지 잘 살펴야 한다.


체스터튼은 '정통'에서 그러한 무게의 해악을 설명하며, "자신을 중시하는 쪽으로 가라앉지"말고 "자기를 잊어버리는 쾌활함 쪽으로 올라와야 한다"고 강조했다. "엄숙함은 인간에게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것이지만, 웃음은 일종의 도약이기 때문이다. 무거워지는 것은 쉽고 가벼워지는 것은 어렵다."


결국 발목에 추를 달 줄도, 손목에 풍선을 달 줄도 알아야 한다는 뜻이다. 양극을 번갈아 오가는 게 아니라, 한 번에 두 겹의 감정을 포용하라는 것이다. 추를 달 때 풍선을 기억하고, 풍선을 달 때 추를 잊지 않기.


삶의 마디마다 기꺼이 가라앉거나 떠오르는 선택이 필요하다면, 여기에서 방점은 '기꺼이'라는 말 위에 찍혀야 할 것이다. 기꺼이 떨어지고 기꺼이 태어날 것. 무게에 지지 않은 채 깊이를 획득하는 일은 그렇게 해서 가능해지지 않을까.



생각하면 무겁기는 쉽고 옹졸해지기도 쉽다. 철옹성을 치는 것은 쉽지만 문을 열고 맞이하는 것은 어렵다. 무거운 게 더 쉬웠던 것이다. 중력의 법칙도 그러하니까. 내려가고 침잠하고 떨어지는 일은 중력과 더불어 매우 가파르게 벌어질 수 있지만, 거스르는 상승이나 도약은 배 이상의 힘을 주어야만 되는 일이니까. 쉽게 생각하면 살찌기는 쉬워도 빼기는 어려운 법처럼. 더하는 건 쉬워도 빼는 건 어려울 것이다.


쉽지는 않겠지만 저자가 말했듯 '기꺼이' 할 용이만 있다면 우리는 좀더 가볍고 덜어낸 인생을 살 수 있는 것이다. 무겁게 사는 일이 쉽기도 했지만 힘들기도 했으므로 가볍게 사는 쪽을 택하며, 넘어지고 일어서기를 '기꺼이' 하겠노라고 생각한다.






가장 말미의 글에서 저자가 왜 '산책자'인지 풀어 설명하고 있다. 그러니까 산책의 쓸모를 생각하는 사람은 '생활 체육인'이라고 하며 산책자와 구분 지었다. '언덕 서너 개 구름 한 점'에서 저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팔을 직각으로 크게 흔들며 갑자기 뒤로 걷는 산책자는 아무래도 이상하니까. 산책 혹은 소요의 가치는 쓸모를 기대하지 않아서 귀해지는 쪽이다. 산책자는 걸을 때만큼은 자신의 '몸'보다 '몸이 아닌 것'에 시선을 둔다. 지난밤의 꿈을 생각하고, 함께 나눈 이야기를 혼자 복기하고, 궁금해하다가 미뤄둔 질문을 다시 꺼내보고, 까맣게 잊었던 얼굴을 문득 보고 싶어하다가, 방금 스쳐 지나간 사람의 모자와 나무를 타는 다람쥐까지 일별한다. 그의 사유는 안과 밖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파도 같다.



그렇다면 내가 하는 행위는 '생활 체육인'에 더 가까운 것 같다. 아무렇게나 빈둥거리며 걷기보다는 몸의 단련을 통해서 강해진 육체와 생각의 단출함을 원하기 때문. 산책자의 예술가스런 몸짓보다는 팔을 강하게 휘저으면서 몸의 땀을 내는 나는 어쩌면 산책자는 아닐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걷기는 자기 안의 모든 것들을 조응하게 한다는 점은 통하지 않을까. 불일치하거나 분리된 퍼즐들이 걷기를 통해서 맞춰지고 완성될 수 있다. 생활 체육인이든, 산책자든 그게 무엇이든 상관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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