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휴의 시작
제법 노랗게 물든 은행나무 그림자를 밟은 채
남빛에 물든 새벽만 바라보는 일이 잦아졌습니다
가을이 보고팠다던 하늘이 그려놓는 풍경 속에는
제 얼굴의 윤곽이 우두커니 서 있고
당신의 목소리는 사라진 지 오래입니다
필경 드물게 자란 꽃무릇처럼 반가울 법한 일도
그 풍경을 대체하기엔 너무 늦었나 봅니다
아침마다 걷는 호숫가에 더러 아른거릴 얼굴도
더는 보게 될 일들이 없어졌습니다
더는 재촉하지도 말아야 할 사연입니다
연휴를 맞기도 전 애써 남긴 약속의 칼날처럼
시절은 인연의 끝을 매달아 푸르게만 번득이는데
난데없이 부는 바람도 그 방향을 알 길이 없고
바람만 쫓던 운명의 책장들이 소리 없이 흔들려
제 삶을 다그칠 풍경소리로 다시 요란할 뿐인데
책장을 넘겨 새로운 낱말들을 새삼 욱여넣으면
또 한 번의 연휴를 맞는 새벽이 제법 차갑습니다
겨울이 곧 다가올 것 같은 예감도 틀린 적이 없고
지난 계절의 훈풍이 삭풍으로 모질게 변하려면
애먼 단풍잎들만 소리 없이 나부낄 것 같습니다
이 시린 계절이 오고 가는 동안
단 한 번 당신을 잊지 않고 지내야 할 것 같습니다
# 단정, 20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