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문학노트

시를 통해 추구하는 시학, 그 도전

김뉘연, '단번에 나타나겠다면'

by 단정


단번에 나타나겠다면

창문을 여는 수밖에 없다. 등장해버린 문장. 문장 앞에서 너는 좀처럼 어찌할 수 없다. 등장한 너를 지우지 않는다. 너를 창문 앞에 세운다. 창문은 나를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물컵에 차를 따른다. 찻잔에 물을 따른다. 주워 온 상자. 빌린 사다리. 모든 것이 등장하려고 한다. 상자를 한쪽에 둔다. 사다리를 세워놓는다. 창문은...... 창문은. 튕겨진 나는 잠시 앉아 있습니다. 접힌 전개도. 조합된 조각. 세워진 것들은 서 있습니다. 찻물이 따라졌습니다. 창문 앞. 등장한 것. 너는 장면이기를 거부하겠다. 앉아 있음. 서 있음. 장면은 너를 받아들이겠다. 사다리에 올라가지 않음. 상자 하나. 드러나 있는 윤곽. 튕겨진 나는 일어나 서 있습니다. 창문은 여전히 나를 받아들이지 않겠습니다. 너는 창문을 향해 손을 뻗을 수 있고 그러지 않는다. 갈 곳 없는 손이 윤곽을 따라간다. 거침없는 손길. 몸짓이 장면을 받아들인다. 빌린 상자. 주워 온 사다리. 접힌 조각. 조합된 전개도. 세워져 있습니다. 손길이 닿지 않은 창문. 나는 창문을 거부하지 않습니다.

# 김뉘연, 이것을 아주 분명하게 (문지,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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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통해 추구하는 시학, 그 도전 :

"사르트르가 문학이란 무엇인가에서 행한 시와 산문의 분석은 여전히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많다. 산문과 구별되는 시의 성격에 대해 그가 말한 것 중 핵심은 시인은 말을 기호가 아니라 사물로 본다는 것이다.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짐작하기는 매우 쉽다. 산문이 말을 사용하여 의미를 제시하는 것과 대조적으로, 시에서는 말이 의미를 실어 나르는 도구가 아니라 마치 자연물처럼 자기 목적적인 존재가 된다는 것이다. 그것이 사물의 뜻일 터이다."

"사르트르의 생각에 입각하여 시를 들여다보았을 때, 이런 추론을 해 볼 수 있다. 예컨대 시인이 꽃에 대한 시를 쓴다면, 시인은 먼저 꽃이라는 사물과 (상상이든, 발견이든, 창조든) 만난다. 그리고 이 꽃에 대해 언어(라는 사물)로 표현한다. 물론 순서는 바뀔 수도 있다. 언어가 먼저이고 꽃이 나중일 수도 있다. 어느 경우든 시를 쓰는 과정에서는 두 (다른 성격의) 사물 간의 결합이 이루어진다. 세계 안에 거주하는 오브제로서의 사물과 말이라는 사물의 관계가 형성된다. 이 두 사물이 접촉할 때 무슨 일이 벌어지는 것일까."

"추론을 조금만 더 진행해 볼 수 있다. 시에서의 이미지라는 것은 말이 개별적인 자립보다는 군집을 통해 회화로의 전환을 용인한 것이다. 이때 말은 말 자체보다는 말이 이루는 풍경으로 회화적 감각에 기여한다. 그리하여 우리는 낱낱의 말이 아니라 말의 섬세한 배치와 이동을 통해 말이 작동함으로써 발생한 이미지를 보게 된다. 물론 이렇게 말이 이미지가 되는 것은 오브제로서의 사물과의 결합에서 촉발되었다고 할 수 있다. 말은 이미지를 보여 줌으로써 오브제 사물에 대한 일종의 표현을 하는 것이다. 사물로서의 제 날카로운 결을 드러내기보다는 표현이라는 행위로 말은 오브제 사물을 비추게 된다. 언어로 무언가를 나타낸다고도 할 수 있다. 이것이 보통의 시가 쓰이는 과정이다."

(이상 인용, kimnuiyeon.jeonyongwan.kr/kimnuiyeon/a-grid-erasure)

새로운 한 주의 첫 작품으로는 문학과지성사에서 가장 최근에 나온 시집인 김뉘연 시인의 신작을 열어보고자 합니다. 이미 '봄날의책' 등에서 여럿의 시집을 출간한 바 있었는데, 오늘 인용한 첫 문장은 그의 첫 시집을 소개하는 홈페이지에서 옮겼습니다. 일종의 '독립출판'과도 같을 성격이지만 꽤나 패기만만한 시인이길래 유독 눈길이 쏠린 탓입니다.

시인은 끊임없이 시와 글 그리고 언어에 대한 고찰과 모색을 시도하며, 그 끝없는 도전이 다소 관념적인 시어들과 복잡다단한 사유방식을 전개하는 형국인데 그렇다고 읽어내는 게 영 불편하지만은 않습니다. 충분히 시도가 가능한 일이며 또 그만큼 이미 그의 선배들이 새겨놓은 투쟁의 흔적들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일 겁니다.

"문장 앞에서" 도무지 "어찌할 수 없"는 "너"는 "지우지 않는" "너"와도 합일된 존재로 인식하게 만듭니다. 혹은 "창문" 앞에 등장한 "풍경"이기도 할 것이기에, 이 대목에 이르게 되면 "너"와 "문장"과 "풍경"은 일거에 하나의 의인화된 대상이며, 결국 시인은 너를, 창문을, 그 문장을 "거부하지 않"는다며 말을 맺습니다. 운명론적인 사랑처럼 이 결구는 어쩌면 시인만의 의지요 독백이자 그동안의 천착에 대한 일종의 갈무리인 셈이기도 할 테죠.

오로지 순수한 시심 하나만으로 시와 문장 그리고 언어를 탐구해온 이력을 갖는 시인들이 제법 많습니다. 가장 최근에 읽었던 목록들이라면 아무래도 같은 출판사에서 나온 김리윤 시인과 하재연 시인 등이 대뜸 떠오르는데, 문득 그 둘의 안부도 궁금해지기만 합니다.

유월의 마지막 한 주가 시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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