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예진, '다정과 과정'
다정과 과정
네 말을 믿지 않았다
옷장에서 공룡을 봤다고
음식점에서 먹은 소시지가 사람 손가락인 것 같다고
길고양이인 줄 알았는데 새끼 호랑이였다고
그저 네가 꾼 꿈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네 문장을 읽으면 이 캄캄한 세상도 곧 아침이 올 것 같아 내가 너를 본받고 싶던 점 중 하나는 남을 쉽게 미워하지 않는다는 거였다
그때의 나는 사람을 쉽게 미워하곤 했다
미운 것을 생각하며 쓰고 잠을 못 자고
사랑했다
너는 나에게 이렇게 말했지
생각이 너무 많다고
생각이 언제든 맹수가 될 수 있다고
소시지처럼 한입에 먹히는 건 내가 될지도 모른다고
이 도시엔 슬픈 것이 너무 많아 아침에 나간 개천에서 흰 새 큰 새 물새 날개를 가진 것이 부지런히 시를 쪼아먹고 있었다 부리를 가지면 서운해도 티가 안 날까 입술이 댓 발 튀어나와도 금방이 마음이 미움을 잊을까
철새는 먼 거리를 이동한다 계절이 다른 곳으로 가면서 날아와 많은 것을 쪼아먹고 다시 먼 길을 떠났다
새가 지나친 뒤 나는 구멍이 빼곡한 시를 들여다본다
그 시절 썼던 시는 휴지통에 넣고
나는 새로 적는다
너는 공룡이 옷장 밖을 노리고 있다고
삼킨 소시지가 속을 후벼판다고
새끼 호랑익 자꾸 몸집을 키우며
골목을 돌아다닌다고
우리는 함께 많은 생각을 떠올려본 적이 있지
그건 맹수이기도 새 같기도 했다
부리 같은 희망
날개를 닮은 여유
국경을 넘어서기 전 너희 집 근처 개천으로 무엇이 날아들었을까 어떤 새들은 다시 일어나고 새 해를 물어다주니까
나는 생활 속에서
네가 말한 것들을 자주 떠올린다
미숙했던 시절이
우리를 조롱하도록 두고 싶지 않았다
그때 쓴 것이 있어서
나는 마지막을 이렇게 적는다
당시 멋모르고 쓴 부끄러움을
너의 빛나는 이야기와 애정을
우리의 과정은 다정이었다는 것을
# 이예진, 장르가 다른 핑크 (문학동네, 2025)
...
기억은 소멸될 수 있을까, 굳이 그러려는 목적은? :
2023년 한국일보 신춘문예라면? '나의 마을이 설원이 되는 동안'이라는 작품보다도 오히려 더 김민정과 박준이라는 이름들이 대뜸 기억에 남는 장면들이 몇 있습니다. 그해 당선작으로 등단을 해 첫 시집을 펴낸 이예진 시인 역시 스펙트럼으로는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이번의 신간을 바라보는 느낌입니다.
'예술은 경험을 보존하는 수단'이라고 말한 알랭 드 보통의 언사를 떠올릴 법한데, 비단 추억만이 그렇게 해당되는 성질의 것은 아닐 것이기에 애써 튀어나오려는 말문을 막아보려 합니다. "우리의 과정은 다정이었다"는 진술 역시 그것에 포함될 것이기에 그렇습니다.
며칠째 글을 좀 쉬던 중에 책을 여러 권 출간하기 위해 이런저런 준비들로 몹시 바빴고, 또 날씨는 하 수상해 변덕스럽고 비는 계속 내리는 과정 중에 있습니다. 건강에도 유의하시는 게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