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문학노트

하반기를 맞는 자세

허연, '칠월'

by 단정


칠월



쏟아지는 비를 피해 찾아갔던 짧은 처마 밑에서 아슬아슬하게 등 붙이고 서 있던 여름날 밤을 나는 얼마나 아파했는지


체념처럼 땅바닥에 떨어져 이리저리 낮게만 흘러다니는 빗물을 보며 당신을 생각했는지. 빗물이 파 놓은 깊은 골이 어쩌면 당신이었는지


칠월의 밤은 또 얼마나 많이 흘러가 버렸는지. 땅바닥을 구르던 내 눈물은 지옥 같았던 내 눈물은 왜 아직도 내 곁에 있는지


칠월의 길엔 언제나 내 체념이 있고 이름조차 잃어버린 흑백영화가 있고 빗물에 쓸려 어디론가 가 버린 잊은 그대가 있었다


여름날 나는 늘 천국이 아니고, 칠월의 나는 체념뿐이어도 좋을 것


모두 다 절망하듯 쏟아지는 세상의 모든 빗물. 내가 여름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 허연, “밤에 생긴 상처” (민음, 2024)



...



하반기를 맞는 자세 :



이제 마지막 주말을 보내면 또다시 칠월을 맞습니다. 2025년도 딱 절반만 남은 셈이죠...


허연 시집을 작년 이맘때쯤에 읽었었는데, 오늘 다시 한번 꺼내 읽는 시는 '칠월'입니다. (개인적으로 허연 시인과의 인연은 재작년의 김수영 문학상 심사대였을 텐데, 그리 좋은 추억을 남기지도 못했었네요)


절절한 시어를 늘 아무렇지도 않게 구사해 가끔 놀라기도 하는 시인의 첫마디에서 우리는 "여름날 밤"이 갖는 어떤 정서를 쉽게 유추해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체념"이요 "빗물"이요 "당신"이자 그 빗물이 파 놓은 "깊은 골"이기도 하죠... 아픕니다. 그 "눈물"이 왜 아직도 시인의 곁에 있는지를 더 궁금해할 필요 없이, 다시 "체념"이 있고 "그대"가 있었기에 가능한 정서일 거예요. 그래서 "늘 천국이 아니고" 또 "절망하는 쏟아지는" 빗물이며, 결국에는 그걸 "사랑"하는 시인의 독백이 들려옵니다. 가슴 아린 시 한 편입니다.


작년 이맘때는 김민기 선생님을 추모하며 같은 제목의 시를 읽고 썼던 게 기억났습니다. 올해는 또 누굴 더 떠나보내야 하는 건지, 아니면 또 어떤 이별의 방식을 맞서야 할지에 대해 조금씩 두려워지곤 합니다. 인생사에서 늘 쉽지 않은 문제예요...


주말입니다.


오락가락하는 비를 보며 맞으며 문득 처연한 '정서'가 생각나서 한 편 꺼내보았습니다.


차분한 시간들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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