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문학노트

일 년이라는 시간

허수경, '공터의 사랑'

by 단정

공터의 사랑

한참 동안 그대로 있었다

썩었는가 사랑아

사랑은 나를 버리고 그대에게로 간다

사랑은 그대를 버리고 세월로 간다

잊혀진 상처의 늙은 자리는 환하다

환하고 아프다

환하고 아픈 자리로 가리라

앓는 꿈이 다시 세월을 얻을 때

공터에 뜬 무지개가

세월 속에 다시 아플 때

몸 얻지 못한 마음의 입술이

어느 풀잎자리를 더듬으며

말 얻지 못한 꿈을 더듬으리라


# 허수경, 혼자 가는 먼 집 (문지, 1992)


...



일 년이라는 시간 :



새벽 내내 허수경 시인의 지난 시집들을 읽었습니다. 마땅한 시편을 찾지도 못해 결국 두 번째 시집의 권두시를 꺼내든 모양입니다.

허수경 시인과의 인연을 또 생각해 볼라치면 무려 1992년의 추억이 있습니다. 제가 문학회에서 '시장' 직함을 달고 시토론을 주관하던 시절이었는데, 하필 한 선배 형이 허수경 시인을 한참 뭐라 비아냥대서 (그날의 시토론 분위기도 썩 좋지 않았던 것 같기도) 아마도 제 기억에는 그날을 기점으로 해 '시장' 직을 냅다 그만두고 도중하차를 한 적이 있었거든요... 이 사건이 훗날에 두고두고 제 발목을 잡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지만요. ㅎㅎ (소위 '문청'의 시절에는 누구나 다 이렇듯 뼈아프고도 후회스러울만한 제각각의 추억들이 있게 마련이죠. 아무튼)

실은 일 년 전의 이맘 때도 이 시인을 기억하게 만드는 인물이 있었나 봅니다. 제가 권하지도 않았는데 인터넷을 열심히 뒤지더니 제 시집을 대뜸 사주셨던 분인데, 그 생각이 나서 슬며시 또 웃어봅니다. 참 고맙고도 소중했던 '인연'이기에 더 그런 모양이겠지요...

네 번째 시집을 출간하는 날입니다. 어느덧 제게도 네 권의 시집이 생겼습니다. 독자들이야 물론이겠지만 정작 시를 쓰는 제가 더 떳떳할 수 있느냐가 제일 중요한 관건일 것이요, 그래서 앞으로도 계속 '퇴고'는 이어갈 계획입니다. (가능하다면 실제 구입을 염두에 둔 독자들을 위한 별도의 한 권짜리 '시선집' 형태를 고민하고 있는 중이기도 해요.)

칠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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