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어떤 편집자님의 강연
오늘 어떤 편집자님이 '책의 구조와 편집 실무'에 대한 강의를 해 주셨다. 나는 며칠간 일러스트를 가지고 씨름하느라 지칠 대로 지친 몸과 마음을 이끌고 강의장으로 갔다. 그림 경험이 없는 내가 하루아침에 일러스트를 멋지게 그릴리가 없었고, 하고 싶은 아이디어는 많은데 할 수 있는 건 없는 답답한 마음에 이것저것 해보다 며칠간 잠을 제대로 못 잔 상태였다. 너튜브에 자주 나오는 웹툰 작가들의 스트레스, 고뇌, 슬픔이 백번 천번 이해되었다.
출판사 없이 혼자 책을 만드는 사람들은 대부분 글과 그림에 고민이 많다. 글 작가들은 그림을 잘 그리고 싶고, 그림 작가들은 글을 잘 쓰고 싶은 마음이 있다. 나는 모든 게 처음이고, 경험이 없어서 글 쓰다 보면 그림을 그려야 하고 그림을 그리다 보면 글을 써야 하는 복잡한 상황에 반복적으로 놓인다.
'책을 만드는 과정애서 내가 경험이 없어서 매뉴얼 없이 우왕좌왕하는 건가? 대체 왜 이러는 거야...'
답답한 마음으로 강의장에 앉아 있는데, 차분한 포스의 어떤 편집자님이 강연을 시작하셨다.
"여기 계신 여러분들은 독립 출판물을 발간하시려는 분들이 반 정도이고, 출판 프로세스를 배우려는 사람들이 반인 것 같아요.. 그리고 몇몇 분 출판사를 차리고 싶으신 분이 계신 것 같고요..."
이 수업 시작 전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를 보면서 편집자님이 말씀하셨다.
"간략히 말씀드리면 만약 100권의 책이 있다면, 최소 100가지 책 만드는 법이 있습니다. 여기 오신 분들이 책 만들기에 대한 기본 개념이나 법칙에 대해 배우고 싶어서 오셨겠지만, 시작하기 전에 감히 말씀드리면... 그런 건 없습니다."
이 강의는 시작부터 짜릿하다. 시작부터 임팩트 있게 궁금증에 대한 갈증이 사라지기 시작해서, 며칠 간의 피로가 싹 날아가는 듯했다.
"책을 만드는 건 경험이 중요한 영역입니다. 경험이 근본과 연결되는 것이죠. 우리가 탐구해야 하는 것은 책에 대한 경험입니다. 책 만들기는 귀납적 탐구의 결과이고, 이론이 먼저 있었던 영역이 아닙니다. 원칙 이론에 기반한 무엇이 있지 않을까?'에 얽매이지 마세요. 언어라는 현상이 먼저 있고, 그걸 정리해서 사전을 만들 듯 책을 출판하는 영역도 모든 게 그러합니다. 단 하나의 원칙, 단 하나의 일반적인 원칙설정이 불가능한 영역입니다.
자신만의 상을 유지하고 확고하게 다져나가는 게 중요합니다. 자신만의 상을 만들어 가는 법칙을 정립해 나가는 것이죠."
나는 며칠 간의 감정적 부침이 모두 사라지는 듯했다.
"내가 어디에 있는지 좌표를 확인하고, 전체와 부분을 함께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조감하는 좌표를 확인해 나가세요."
정말 맞는 말이다. 글을 쓰든 그림을 그리든 내가 지금 잘하고 싶은 챕터에 몰두하게 되면, 거기에 너무 빠져서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지 잘 모를 때가 있다. 그 챕터에 너무 힘을 주게 되면 그 부분이 너무 도드라져 보이기도 하고... 그림을 그릴 때는 너무 몰입해서 내가 색칠하고 있는 곳만 보다 보면 그 부분의 색감이 너무 심하게 과장되게 칠해지기도 한다. 색을 칠해 주고 전체적인 그림을 한 번 훑어야 실수가 줄어드는 것 같다.
"자 그럼, 제가 오늘 여러분께 말씀드리고 싶은 이야기는 총 3가지입니다.
1) 출판 이란 무엇인가?
2) 책은 무엇인가?
3) 책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그리고 마지막으로 출판사들이 모여서 책을 만드는 것이 좋은 지 왜 그렇게 하는 지를 간략히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편집자님은 자신의 감정을 너무 강하게 드러내지 않으면서, 차분한 어조로 침착하게... 청중들이 이해하기 쉽게 반복적으로 주제를 체계화시켜 나가면서 요점을 전달하는 모습이 감동적인 분이었다. 나는 며칠 간의 감정적 부침에 대한 피곤함은 이미 잊은 지 오래였고, 이분의 말씀을 놓칠세라 많은 이야기들을 노트에 빠르게 필기해 나갔다. 한 마디로 이분은 명강사님이다.
"먼저, 출판 이란 무엇인가? 출판의 사전적 정의는 '널리 배포하는 일'입니다. 배포는 널리 퍼트린다는 것이죠. 영어의 publishing은 공표한다는 의미가 있는 말이고, 독일어로 Erscheinung은 빛을 보게 한다는 뜻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출판은 한 마디로 media의 역할을 하는 것이고, 여러분이 관심 있으신 독립출판은 독립적이고 자유로운 media를 활용하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실무적 측면의 출판의 정의는 '계약을 이행하는 일'입니다. 책에는 저자가 존재하고, 저자와 계약을 맺고 계약을 이행해서, 누군가의 저작물을 펴내는 것이 출판사가 하는 일입니다. 여기서 저자는 저작재산권자이고, 출판사는 출판권자입니다. 출판사는 저자의 저작물을 배포해서 이익을 창출하는 것이죠.
그러므로 출판사의 고객 관리란 독자에 대한 이해도 있어야 하지만 대부분 저자의 발굴과 관리가 상당히 중요합니다."
나는 독립출판물을 발간할 계획이라, 모든 걸 그냥 내가 다 하면 되지만, 출판의 세계가 이렇게 돌아가는 줄 생각도 못 했다.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나도 모르겠지만 참고로 알아두면 좋은 이야기였다. 편집자님은 빠르게 다음 주제를 연결해 나가셨다.
"그럼, 책이란 무엇인가? 책은 네모난 종이죠. 누군가의 생각이나 주장을 담은 원고(글이나 그림)를 종이에 인쇄해서 묶은 것입니다. 요즘엔 누군가의 생각, 주장 이 부분을 콘텐츠라고 합니다. 그리고 인쇄해서 묶은 것이 콘텐츠를 담는 그릇, 컨테이너가 되는 거죠. 앞으로 이 콘텐츠를 담는 방식은 계속 변해가겠죠. 어느 때보다 변화가 빠른 시대에 살고 있으니까요?
그러면 책을 만드는 우리는 '지금 책이 왜 나와야 하는가?'에 답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를 들면 '동시대 노벨 문학상 수상작'과 같은 어떤 context가, 즉 맥락이 있어야 합니다.
그럼 '왜 만드는가?' 첫 번째로는 '독자의 필요에 부합하기 위해 만든다.' 두 번째는 '저자와 계약이 되어 있으니 만든다.' 아까 말씀드렸다시피 출판사의 가장 큰 고객은 저자입니다.
필요에 부합하는 일이 바로 편집자가 하는 일입니다. 책은 돈을 지불하고 사는 재화이죠? 그러면 독자의 목적과 효용에 맞게 원고를 다듬어야 합니다. 책 만드는 일, 원고의 교정 교열을 보는 일 모두 편집자가 하는 일입니다. 교정 교열은 편집자가 하는 일의 한 부분이고, 외서의 경우 원서 대조와 번역, 검수 작업도 합니다. 보통 1교~3교까지 보고, 숙련된 사람이 OK교를 봅니다. 초교, 재교를 보는 사람과 OK교 보는 사람은 다른 사람입니다. 다른 눈으로 최소 2명이 함께 하는 것이죠."
아, 이렇게 복잡한 과정을 거쳐서 정성껏 책이 나오는 줄 몰랐다. 편집자님은 자기 경험을 녹인 이야기들을 해주시면서, 계약서를 확인하는 것이 편집의 첫 번째 단계라고 하셨다. 출판은 출판사와 저자의 계약에서 시작하니까... 편집자가 교정을 보면서 역자나 저자에게 확인받는 과정도 있으므로 이 부분에서 일이 지연될 수 있는 점을 고려해서 편집자는 먼저, 계약 내용을 숙지하고 일을 진행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책을 만드는 과정에는 여러 번 가제본 해서 판형을 살펴보고, 안에 레이아웃이나 페이지 수를 맞춰 가는 과정도 있고, 디자이너와 표지 디자인을 협의하고 그것을 시장에 나가 서점 주인들에게 인풋 받는 과정도 있다는 걸 말씀하셨다. 지금 내가 아름아름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가제본을 만들고 판을 엎고, 다시 쓰고, 일러스트를 고치고, 여러 사람의 의견을 묻고 고치고 하는 일들은 부족해서가 아니라 어쩌면 책 만드는 과정에서 경험을 쌓기 위한 그냥 다 자연스러운 일인 것 같았다. 묘하게 용기가 났다.
"마지막으로 책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저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출판사이지만, 열린 책들의 『편집 매뉴얼 2023』을 참고해 보시면 많은 정보를 얻으실 수 있어요. 그리고 제가 프린트물을 만들어 왔는데요. 한 번 나눠 드릴게요. 읽어 보시면 입고 및 일독 단계가 있고, 편집 단계가 있고, 제작 산출서 발주서 단계가 있고 PDF 검판을 거쳐서 책이 됩니다."
나는 모든 강의를 차근차근 알기 쉽고 듣기 쉽게 말씀해 주고, 자신과 관계없는 출판사의 책도 청중을 위해서 소개해주고, 이렇게 직접 정리한 프린트물을 나눠주는 편집자님의 정성에 감동했다.
"마지막으로 회사들이 모여서 책을 만드는 이유는 질과 양을 모두 높이기 위해서 하는 겁니다. 출판사로 모여서 하면 big scale이 가능합니다."
나는 big scale이란 말이 한 번에 이해가 갔다. 문득 그 말이 너무 멋있게 느껴졌다. 언젠가 나도 이 big scale에 참여해 보고 싶단 생각도 들었다.
"자, 저의 강의는 여기까지이고요. 질문받겠습니다."
강의도 너무 좋았고, 이분도 좋아서 나는 꼭 묻고 싶은 게 생겼다. 적당한 타이밍에 손을 번쩍 들었다.
"먼 길 오셔서 좋은 강의 들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덕분에 책에 대해 많은 걸 배웠습니다."
나는 진심을 다해 말했다. 편집자님의 얼굴이 좀 붉어지는 듯했다.
"아무래도 원고는 마지막까지도 아쉽고, 완전한 원고라는 것은 없는데요... 인쇄하고도 후회되는 게 원고이니까요... 아무래도 모든 게 경험과 감이겠지만, 책을 만들다가 어느 순간 이 정도에서 책을 내야겠다고 판단하는 편집자님만의 기준이 있으신가요? 있으시다면 꼭 듣고 싶습니다."
편집자님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말씀을 이어갔다.
"굉장히 어려운 질문을 하셨는 데요... d-day가 책을 만드는 것 같아요. '책은 마감이 만든다.'라는 말이 있는 것처럼요. 저의 경우는 이 책이 내 손을 떠나도 된다. 최소 2인의 편집자가 막힘없이 읽혀 내려간다는 OK 사인을 줄 때 출판했었고... 책이 막힘없이 읽혀 내려갈 때 점검하고 확인하는 과정에서 어느 순간 자신이 의심이 들지 않는 순간이 옵니다. 더 이상 의심들이 나오지 않는 순간에 그때 책을 출판했습니다."
나는 감사의 마음을 전하며,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 분을 또 만날 수 있을까? 편집자님의 자상함이 고마운 강의였다.
강의장을 나오며, 어차피 책 만들기는 모든 게 경험을 쌓는 과정이라면 경험이 전혀 없는 내가 겪는 오늘의 부침이 다 이해되었다. 그냥 단단히 마음먹고 흔들림 없이 의심이 들지 않는 순간까지 책을 수정해 보리라 다짐했다. 어느새 난 열린 책들의 『편집 매뉴얼 2023』을 주문했다. 이 책에 쓰여 있는 내용이 책 만들기에 도움이 될 거란 마음도 있었지만, 편집자님이 책을 보여주실 때 인덱스 테이프를 엄청나게 붙여 놨던 흔적을 보았기 때문이다. 앞으로 일 하다가 만약 인연이 된다면 이 편집자 님을 다시 한번 만나보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고, 개인적으로는 편집자님이 느낀 감정을 나도 책을 보며 한 번 같이 느껴보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