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아침, 나는 피로가 덜 풀린 상태로 방석에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평소 같으면 모바일 메신저 진동 따윈 느껴지지 않았을 텐데, 자세가 영 꾸부정한 나머지 방석 아래 깔려 있던 핸드폰 진동이 온몸에 전해졌다.
"용희 님 잘 지내요?"
<미쓰 탠저린> 언니의 연락이었다. <미쓰 탠저린> 언니는 차분하고 조용한 여자여자한 성격의 소유자로 나무에 대해 관심이 많다. 언니를 처음 만난 건 작년 가을 어떤 단체에서 한라생태숲을 방문했을 때였다. 언니도 나도 일행 없이 혼자 참석한 관계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친해졌다. 우리는 둘 다 나무를 좋아해서 서로 호감을 느꼈고, 나는 그날 2차로 언니를 소산오름에 초대하고 함께 맨발로 걸었다. 우리는 어린 시절로 돌아간 듯 즐거웠고, 헤어질 때 언니는 차에 있던 귤을 내게 잔뜩 주었다. 그래서 그때부터 언니는 내게 <미쓰 탠저린>이 되었다.
"언니, 안녕하세요?"
나는 빠르게 답장을 보냈다. 사실 어제 난 언니가 생각나서 함께 삼의악 오름에 가자고 연락하려고 했었다. 하지만 언니는 사려 깊고 배려심이 많은 성격이라 언니가 바빠서 내게 같이 못 간다고 대답할 상황이 되면 내게 지나치게 미안해할까 봐 그냥 어제 혼자 다녀온 참이었다. 오늘도 나는 삼의악에 홀로 갈 생각이었는데, 갑자기 연락 온 언니가 반갑기도 하고 나도 언니가 보고 싶던 참이라 ‘서로 뭔가 통했나?’ 하는 마음에 신기하기도 했다.
"그렇지 않아도 어제 언니 생각나서 연락드리려다가 바쁘실 것 같아서 연락 안 했었는 데요... 시간 되시면 함께 걷자고요."
"그럼, 말 나온 김에 오늘 볼까요? 거문오름 트레킹 가고 싶은데 무리 될까 고민 중이거든요."
언니는 보통 차를 타고 이동하는 코스는 좋아하지 않는 것 같은데, 오늘 언니의 컨디션이 좀 좋은 것 같았다. 나는 언니와 거문오름에 가면 즐거울 거로 생각했지만 아쉽게도 거문오름은 당일 예약은 안 돼서 항상 계획을 짜서 움직여야 하는 곳이다.
"거문 오름 좋죠. 거문오름은 사전 예약이라 당일 예약은 안 되더라고요."
나는 아쉬운 마음을 달래며 메시지를 보냈다.
"지금 국제트레킹 기간이라 아무 때나 가면 돼요."
언니는 내게 신문을 캡처 한 사진을 보냈다.
'아... 왜 그걸 몰랐지?'
거문 오름은 국제트레킹은 평소 예약이 필요하던 거문오름에 예약 없이 갈 기회로 행사장 앞에는 다양한 체험 이벤트도 진행하고, 행사 동안은 트레킹 코스를 대중에 무료로 개방한다. 보통 7월에 행사하는 데, 올해는 좀 앞당겨 6월에 행사를 진행하는 모양이다. 나는 평소 거문오름을 좋아해서 자주 가는 데 ‘왜 내가 올해는 이 행사를 몰랐을 까?’ 싶으면서도 알게 된 이상 기회를 놓칠 순 없었다.
"오? 정말요? 그럼, 오늘 가실래요? 트레킹 기간에 볼 거 많은데..."
나는 언니와 급히 만날 약속을 정하고, 약속 장소로 향했다.
"이렇게 만나는 거 좋은데요?"
언니는 차에 타면서 내게 말했다.
"저도요. 제주에 살지만 이렇게 나가니까 꼭 여행 가는 기분이에요."
나는 웃으며 언니에게 대답했다.
우리는 차에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고, 한참을 달려 거문오름 탐방안내소에 도착했다.
"여기 코스가 여러 개 있던데..."
미리 많은 생각을 하고 온 언니가 말했다.
"여기는 정상까지 1시간 코스이고요. 분화구 코스는 1시간 30분으로 분화구까지 보고 가면 2시간 30분이 걸려요. "
나는 평소 익숙한 코스를 언급하며 설명을 덧붙였다.
"정상까지 가보시고 만약에 너무 힘드시면 내려가도 되는 데, 좋은 건 다 분화구 코스 안에 있어서 분화구는 보고 가는 게 좋아요."
내 얘기를 듣고 언니는 말했다.
"저 원래 걷는 걸 잘해서 오늘 이렇게 나왔으니까, 분화구까지 보고 갈 수 있을 것 같아요. 한 번 마음 먹기가 어려워서 그렇지 마음먹고 나오면 또 잘 걸어요."
"아, 우리가 운동하러 갈 때 헬스장 가기 싫어서 한 참 숨 고르고 마음먹다가 막상 가면 운동이 잘 되는 그런 것처럼요?"
"맞아요. 그런 거죠."
언니의 대답에 나는 함께 거문오름에 오랫동안 머무를 수 있다는 생각하니 기분이 좋아졌다. 나는 언니에게 내가 왜 이곳을 좋아하는지 최대한 설명하고 싶었다.
"저는 거문오름을 정말 좋아해요. 분화구 안에 있는 공기가 압도적으로 좋거든요. 약간 다른 오름하고는 또 달라요. 전에 만난 해설사님께서 분화구 코스에 식나무가 많아 뇌를 맑게 해주는 작용을 한다고 하시더라고요. 얼마 전에 와 보고 또 오고 싶었었는데 오늘 마침 언니랑 이렇게 오게 되었네요."
이야기를 나누며 우리는 행사장에 들어섰다. 행사장 앞에서 팸플릿과 거문오름 안내 책자를 받았다. 거문오름은 화산활동으로 형성된 곳으로, 지질학적 가치와 생태적 가치를 인정받아 2005년 국가지정문화제 천연기념물 제444호로 지정되었으며, 2007년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으로 등재됐다. 국제 트레킹 행사는 2008년부터 매년 진행된다.
거문오름은 나무가 우거진 울창한 숲이 검은색을 띠고 있으며, '신령스러운 공간'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오름의 높이는 해발 456m로 지금으로부터 약 30만 년 전에서 10만 년 전 사이에 형성되었다. 분화구로부터 유출된 용암이 경사를 따라 북동쪽으로 14km 흘러가면서 벵뒤굴, 웃산전굴, 북오름굴, 대림굴, 만장굴, 김녕굴, 용천동굴, 당처물동굴을 만들었다. 하나의 화산으로부터 이렇게 긴 거리를 따라 동굴이 만들어지는 경우는 세계적으로 드물기 때문에, 이 거문오름용암동굴계는 지질학적으로 세계에서 가장 뛰어나고 가치 있는 동굴로 평가되고 있다.
이러한 용암이 분출되면서 이곳 거문오름에는 독특한 곶자왈 지형이 형성되었다. 제주 사투리로 '곶'은 숲을 말하고, '자왈'은 자갈이나 바위 같은 돌멩이를 말하는 데, 즉 곶자왈은 돌이 많은 숲을 의미한다. 이 이름에 걸맞게 거문오름에 들어서면 영화에서 볼 수 있는 원시림들이 바위 위에 자리 잡고 앉아 바위틈으로 뿌리를 내리고 있는 독특한 모습을 볼 수 있다. 또한 오름 내부에는 다양한 동·식물이 자생하여 생태적 보전 가치도 뛰어나다고 평가받고 있다.
"언니, 우리 행사장부터 둘러봐요."
"좋아요."
우리는 행사장을 둘러본 뒤 숲으로 들어가기로 했다. 행사장 입구에는 '천연 모기 퇴치제 만들기'와 ‘무료 책 나눔 행사'가 진행되고 있었다.
"여기 있는 책들은 다 무료예요. 1인 1권은 무료로 가져가실 수 있어요.
친절한 행사요원님의 안내를 받아 나는 나중에 책을 만들 때 필요할 것 같은 음식 관련 소설책 한 권을 골랐다.. 거문오름에서도 이렇게 책을 만질 수 있다는 점이 기뻤다.
행사장 안쪽으로는 선흘2리 마을회에서 판매하는 '거문오름 티셔츠'와 '선흘리 지도 스카프' 판매대가 있었고, 해설사님들께서 직접 운영하시는 만들기 체험 부스가 있었다.
"언니, 우리 만들기 할래요?"
나는 나무로 만드는 큐브를 보면서 말했다.
"우리 내려와서 한 번 해봐요."
언니의 말에 나는 내려와서 천천히 행사장을 즐기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아 그렇게 하기로 했다. 거문오름에 들어가려면 탐방안내소에서 출입증을 받아야 하므로 나는 명부를 작성하고 2개의 출입증을 받았다.
"혹시, 책 아까 받은 게 있는데요, 여기에 맡겨도 될까요?"
나는 거문오름 안내 책자와 무료 나눔 책을 모두 들고 트레킹을 할 자신은 없어서 탐방안내소에 문의했다.
"저 뒤쪽에 사물함을 이용하세요."
"아..."
나는 여기에 7년 전부터 드나들었었는데, 여태 이곳에 사물함이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 사물함은 무료로 이용할 수 있어서 부담이 없어 더 좋았다. 다음에 올 때도 혹시 필요하다면 사물함을 이용하면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언니, 이쪽으로 오르면 돼요."
나는 익숙한 길이라 자연스럽게 언니를 리드했고 언니와 나는 초입에 있는 삼나무 길을 걸었다.
"이 삼나무는 빨리 자라고 땔감으로 쓰기도 좋고 해서 1970년대에 많이 심었다고 하던데요. 지금은 삼나무가 주변 나무들을 아무도 못 자라게 하고 나뭇잎도 많이 떨어져서 인기가 많이 없어졌다네요. 이 밑에는 고사리나 천남성 같은 몇몇 풀들만 자란대요."
"어? 맞네요. 여기 천남성 있어요."
천남성은 맹독성이 있는 풀로 예전에 사약을 만들던 풀이다. 모양은 탐스럽고 커다란 잎에 잎맥도 뚜렷해서 예쁘게 생겼다. 원래 천남성은 윤기가 흐르지만, 거문오름처럼 온도 습도가 딱 맞는 곳에 있어서인지 이곳 천남성은 유독 반짝반짝 빛이 나는 것 같다. 참고로 천남성은 먹어도 위험하고 만져도 위험하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우리는 어느새 정상으로 향하는 계단에 도착했다. 계단은 가파르고 높아 보이지만 총 250개로 되어 있다. 이 길만 참고 오르면 거문오름에서 가장 힘든 길이 끝난다. 나는 이곳이 익숙하기도 했고, 언니와 대화하면서 오르니 힘든 줄도 몰랐다.
정상에 오르니, 탁 트인 전망과 파란 하늘이 아름다웠다. 거문오름에 갔을 때 이렇게 맑은 날을 만나기 어려운 데 정말 운 좋게도 날씨 좋은 날에 왔구나 싶었다.
언니와 사진을 찍고 뒤를 돌았는데, 정상 근처에도 일본군이 파놓은 갱도 진지가 보였다. 나는 분화구 코스에만 일본군 진지가 있는 줄 알았는 데, 정상에도 일본군이 진지를 파 놓은 진지가 있었다. 나는 기분이 좋을 때마다 한 번씩 이런 슬픈 역사를 마주하는 게 힘들다.
거문오름은 정상에 올라서면 해안에서부터 펼쳐진 다양한 오름들을 조망할 수 있기 때문에 당시 일본 해군 기지가 설치됐던 서우봉과 성산일출봉도 쉽게 볼 수 있다. 따라서 거문오름은 산속 깊은 곳이라 숨기 좋고 조망까지 좋아 천혜의 요새 역할을 했던 것이다.
일본군은 1945년 8월에 7만 5천여 명이 주둔했었고 당시 제주 인구가 21만 명 정도였기 때문에 어마어마한 병력이었다. 따라서 이런 진지를 파는 것에 많은 제주사람들이 동원됐었다고 한다. 제주 곳곳에 이런 슬픈 역사의 흔적이 아직 많이 남아 있다.
어느덧 우리는 정상 코스를 보고 내려왔다. 분화구 코스 앞에서 해설사님이 우리에게 물었다.
"어느 코스로 가세요?"
"분화구 코스로 가려고요."
"분화구 코스는 10분 후에 출발 예정이니까요. 저쪽 대기하는 곳에 쉬면서 기다리세요."
우리는 해설사님의 안내에 따라 대기하는 곳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대기소 옆 POP에는 코스 소개가 있었는데, A 코스는 정상 코스, 분화구 코스, 능선 코스를 잊는 전체 코스로 평소 내가 많이 가던 길이었고, B 코스는 용암길이라고 해서 지금부터 약 6km, 3시간 30분이 더 소요되는 길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많은 사람들이 "어느 코스로 가세요?"라고 묻는 해설사님의 질문에 "용암길이요."라고 답했다.
나는 분화구 코스를 좋아해서 용암길이라고 대답하는 사람들에 대해 별다른 생각을 하지 못하고 그냥 앉아서 대기하고 있었다. 이윽고 POP 사진을 한 장 찍는 게 좋다고 생각한 나는 사진을 찍으러 다가갔는데, 어떤 여자 해설사님이 다가오셨다.
"저기... 평소에 검은 오름 자주 오세요?"
여자 해설사님이 조심히 질문하셨다.
"저는 자주 오고요. 언니는 오늘 처음이에요."
나는 언니를 쳐다보면서 말했다.
"그럼, 용암길 가보시는 건 어떠세요? 용암길은 평소 일반에 공개되지 않고, 이 트레킹 기간에만 보실 수 있어요."
해설사님은 진정성 있는 눈빛으로 말했다.
"아, 정말요?"
"네. 지금 가시려는 분화구 코스는 다음에 또 오셔도 언제든지 구경하실 수 있는데요. 용암길은 보기 힘들거든요. 이끼도 많이 껴 있어서 비 오는 날은 트레킹하기 어렵고요... 한 마디로 가보기 어려운 길이예요. 이 길을 따라가시면 숲이 나오고 숲을 따라가다 보면 벵뒤굴이 나와요. 거기서 조금만 가시면 마을이 나오고, 마을에서 셔틀버스를 타고 다시 탐방안내소로 돌아오시면 돼요."
해설사님의 말씀에 우리는 어느 코스로 갈지 고민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