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당신은 어떤 친구를 원하나요? 연극 난파, 가족

by 김용희

세상에는 여러 종류의 친구가 있겠지만, 요즘 내가 생각하는 2부류의 친구가있다.


「옳은 말을 해주는 친구.

그냥 옆에 있어 주는 친구.」


나에게 모든 친구가 소중하지만, 이 2부류의 친구에게는 각각 대체 불가능한 장단점이 있다고 생각한다.

먼저, 옳은 말을 해주는 친구의 좋은 점은 어떤 일을 제대로 멋지게 완수하도록 도움을 준다. 예를 들면 어떤 도자기를 만들고 싶다고 생각했을 때, 도자기 장인 친구가 있다면 쉽게 내가 필요한 조언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모르는 분야에 대한 전문지식을 갖고 있기도 하고, 경험도 풍부할 테니까. 그 친구와 함께한다면 어쩌면 시야도 넓어지고 새로운 분야에 손쉽게 들어갈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친구의 단점은 아마도... 심적으로 너무 지쳐있는 날엔 듣기 힘든 말을 들을 수 있단 거겠지?


두 번째로, 그냥 옆에 있어 주는 친구가 있다. 이 친구는 능력이 출중해 보이지 않을 수도 있고, 그저 그런 사람으로 보일 수는 있겠지만... 그냥 같이 있기 친근하고 편하다. 헤어지면 자꾸 찾게 되고, 친구가 날 찾는 날엔 부담 없이 만나러 나갈 수도 있다. 그리고 이 친구는 친하게 지내다 보면 가끔 영감을 줄 수도 있다.


며칠 간의 연극 관람으로 알게 된 건, 세상에는 다양한 친구가 있듯 다양한 연극이 있다는 것이었다. 모든 연극이 무대장치, 배우들의 연기가 다르고,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주제에 대한 전개 방식이 다양하다.


그게 어쩌면, 연극의 묘미인 걸까?


이번에 관람한 연극 '난파, 가족'은 옆에 있어 주는 친구 같은 연극이었다. 경상남도에서 출전한 '사단법인 극단미소'의 연극인 '난파, 가족'은 많이 본 듯 친숙한 무대 장치에, 친숙함을 자랑했다.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내 옆에 있는 늘 보던 친구 같은 연극이었다. 하지만 내가 이 연극을 보고 펑펑 울었다는 건 아무도 모르겠지? 친구처럼 차근차근 이야기하다 훅 치고 들어오는 부분에서 미처 방어를 못 했다. 이런 앙큼한 친구 같으니...


참고로 난 이 연극제를 통해 봤던 3편의 연극 중 ‘난파, 가족’이 가장 좋았다. 편안하고 친근하고 충격적인 장면도 없고 감동적이었다.


어머니 역할의 배우님은 너무 친숙한 나머지 TV에 자주 나오는 어떤 탤런트처럼 보이기도 했다. 연기를 잘하셔서 성함이 뭔지, 진짜 탤런트가 맞는지 여기저기 찾아보았는데, 아쉽게도 극단 홈페이나, 신문 기사에도 배우들의 이름이 없어서 아쉬웠다.


어쨌든 이 연극의 대략적인 줄거리는 이렇다.


이름난 식당인 '황가정'의 사장인 황택수는 고집스럽게 가게를 지켜왔다. 최근 '명장' 타이틀도 달았고, 포상으로 인도네시아로 여행도 떠나게 되었다. 하지만 그의 일방적이고 완고한 성격 때문에 가족들도 직원들도 고집스러운 그를 좋아하지 않았다. 인도네시아에서 배를 타고 관광하던 그는 난파당했다. 그를 찾을지 말지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가족들의 이야기가 펼쳐졌다.


"용희 씨, 저 오늘 연극 못 가요."


단톡방에 혜수 언니가 글을 남겼다. 공연 당일 아침은 세찬 장맛비가 내렸다. '이런 날에도 사람들이 연극 보러 올까?' 나는 아침부터 궁금하던 차에 예상하던 메시지가 도착했다고 생각했다.


"언니, 아쉬워요."


나는 단톡방에 글을 남겼다. 어제도 생각했었지만, 나는 연극은 혼자 보러 가지 못하겠다. 그냥 극장 안이 너무 외롭게 느껴지고, 이 연극제는 어떤 연극이 공연될지 예측 불가능하므로... 사실 오늘 연극엔 미자 언니와 김 반장님도 오시기로 했지만, 언니네는 1열, 우리는 9열이라 극장 안에서는 서로 너무 멀었다.


나는 모자리나 언니에게 연락했다. 언니도 연극을 좋아하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지난번에 나는 나와 관련 없는 설명회에 같이 가기도 했었고, 언니가 같이 가야 하는 다른 설명회가 있다면 한 번 가준다고 약속했기 때문이다.


"언니, 오늘 문예회관에서 3시에 연극공연이 있는데요. 언니도 같이 가실래요?"


"언니 2시에 피부과. 미안 but 언니 오늘 예뻐지는 날."


언니의 문자였다. 역시 모자리나 언니는 이름답게 미용에 관심이 많다.


나는 그 후에도 몇몇 친한 언니들에게 연락해 보았지만, 장맛비가 세차게 내리기도 했고, 금요일 오후라 다들 일정이 많아 결국 나는 혜수 언니를 대신할 친구를 찾지 못하고 연극에 혼자 가게 되었다.


'뭐, 혼자면 어때? 그래도 난 연극이 궁금한걸.'


나는 요즘 연극제에서 연극이라는 신세계를 경험하는 게 좋아서 오늘은 과감히 혼자라도 가보기로 했다.


"용희 씨, 우리는 먼저 들어왔어요. 연극 재밌게 봐요."


공연 시작 15분 전, 미자 언니의 문자였다.


내가 막 차를 주차한 시점이었다. 나는 문예회관 사진을 찍기 위해 정문으로 향했다. 운전하며 정문으로 들어올 때 보니까, 문예회관 앞 하르방과 건물 위에 쓰인 문예회관이라는 파란색 글씨가 서로 잘 어울려 보여서 한 장 찍고 싶었다.


빗방울을 뚫고 정문으로 향하는 데, 현장 부스에서 안내 요원 아저씨들이 소리치셨다.


"그냥 가시지 말고, 연극 보고 가세요."


아마 빠르게 정문으로 향하는 내가 집으로 가는 사람인 줄 아신 것 같다.


"아, 저 예매했어요. 연극 볼 거예요."


"아... 네. 감사합니다."


나는 현장에서도 표를 배부하나 싶어서, 나중에 연극이 끝난 후 안내데스크에 문의해 보았다. 문예회관은 좌석 수가 많기 때문에 3시 공연이면 2시까지 도착하면 현장 배부되는 표를 받을 수 있다고 하셨다. 이번 연극제 내내 그랬는지 물어보니, 적어도 제주에서는 그간 현장 배부가 있었다고 했다. 앞으로 진행될 다른 시도의 연극제에서는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말씀과 함께.


나는 관객들에게 여러모로 좋은 기회를 주는 이번 연극제가 참 뜻깊다고 생각했다. 공연 시간 4분 전 나는 사진 촬영을 마치고 공연장으로 입장했다. 비가 내려 관객들이 오지 않으면 어쩌나 생각했었는데, 생각보다 사람들이 많았다.


혜수 언니와 내가 예매한 자리는 B구역 9열 11번, 12번 자리였다. 나는 통로 쪽 좌석인 12번 자리에 앉았다. 옆에 혜수 언니가 없어 쓸쓸했다.


이윽고 초록 원피스에 은발을 한 <노숙녀> 분이 통로에 나타났다. 레이스 양말에 샌들, 꽃무늬가 그러진 핸드백이 인상적인 분이었다. 그분은 갑자기 내 옆으로 오시더니 9열 11번 자리에 앉았다.


'어?'


거기는 혜수 언니 자리로 내가 예매한 자리인데... 나는 잠시 이 자리가 <노숙녀> 분의 자리가 아니라고 말을 할까 말까 고민하다가, 이분을 혜수 언니 대신 온 내 친구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같이 보면 외롭지 않고 좋지, 뭐.'


노숙녀 분은 귀에 손을 댔다. 혹시 보청기를 끼시나? 궁금해서 바라보니 귀에 있던 아이팟을 케이스에 넣고 계셨다.


'오, 뭔가 세련된 분이네.'


나는 젊게 사시는 이분이 신기해서 잠시 <노숙녀> 님을 관찰하기로 했다. 숙녀님은 좀 특이한 분이었다. 갑자기 표를 드시더니 자신과 함께 셀카를 찍었다. 보통은 표만 찍는데...


'B열 8열 9번'


<노숙녀>님 티켓에 볼펜으로 쓴 손 글씨가 뚜렷이 보였다.


'현장 배부받으셨나 보네.'


나는 원래 그의 자리인 8열 9번 자리를 바라보았다.


<노숙녀>님과 비슷한 나이대의 웬 신사분이 앉아 계셨다.


'저분도 다른 사람 자리에 앉으셨나 보네.'


징소리가 울리고, 곧 연극이 시작되었다. 연극은 황택수의 가게 '황가정'을 배경으로 진행되었다. 옆에 있던 숙녀분이 갑자기 마스크를 벗으셨다. 나는 연극 시작 전에는 마스크를 쓰다가 시작하니 벗으시는 건 무슨 이유인지 문득 궁금해졌다.


연극은 경상도 사투리로 진행되었는데, 문제는 이 사투리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전달의 어려움이 좀 있어 보였다. 나는 예전에 경상도 분들과 일을 했던 적이 있어서, 사투리에 익숙했음에도 불구하고, 대극장 무대에서 마이크 없이 내뱉는 사투리를 이해하기 좀 버거웠다. 극이 진행될수록 귀가 뚫려서 그런지 알아들을 수 있었지만... 익숙해지기까지는 시간이 걸렸다.


'지역색을 살리는 것도 좋은 데, 대회에서는 어쩜 표준어를 쓰는 것도 나쁘지 않겠네?'


이런저런 생각이 들었다. 어머니 역 배우님은 워낙 안정적으로 연기를 잘하셨고, 인도네시아 인 역을 맡은 여자분과 점쟁이 역을 맡은 여자분의 감초 연기도 인상적이었다.


처음에는 별다른 무대장치 없이, 무대를 왼쪽, 오른쪽으로 나누어 쓰는 게 어색했지만, 황택수가 섬에 들어간 장면에선 무대 오른쪽이 갑자기 섬으로 바뀌어 있어서 무척 놀랐다.


"엥? 장독대가 언제 섬으로 바뀐 거야?"


나는 무대장치를 어떻게 옮겨놨을까 신기하며 연극을 관람했다. 나중에 생각 해보니 오른쪽 날개 쪽에 설치된 무대장치를 뒤로 돌린 것 같았다. 그러니까 '황가정' 식당의 오른쪽 벽 2개를 앞으로 돌리면 장독대가 놓인 식당 벽이 되고, 뒤로 뒤집으면 섬 배경이 되는 설치물이었다.


무대 장치를 고민하는 데, 옆에 앉은 <노숙녀> 님이 꾸벅꾸벅 졸면서 내 쪽으로 고개를 내미셨다.


나는 오늘 이 <노숙녀> 님은 내 혜수 언니 대신 온 내 친구였지만, 여기서 곤히 주무시는 걸 보니 왠지 우리 혜수 언니가 생각났다. 보고 싶은 혜수 언니.


'황가정'의 사장 황택수가 인도네시아에서 난파된 걸 알게 된 가족들은 그를 찾을지 말지, 회의했다. 나는 그 상황에서 당연히 아버지를 칮아야 하는 건데 가족들이 아버지를 찾을지 말지 고민한다는 게 너무 짠하게 느껴졌다.


떠나기 전 부인은 황택수에게 여행 가방을 싸 주었는 데, 남편의 가방을 준다는 게 자기 가방을 주는 바람에 그 안에 있던 부인의 일기를 무인도에서 황택수가 읽게 되었다.


극 중에는 황택수는 일기를 읽고, 부인은 독백하는 장면이 나왔는데... 무대 조명이 그녀를 비추자,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왔다.


그녀의 대사가 무엇이었는지, 왜 눈물이 났는지, 연극을 보면서도 계속 생각했지만... 대체 왜 내가 이 장면에서 눈물을 흘렸는지는 알다가도 모르겠다.


예측하건대 나는 그 가족의 모든 사람이 불쌍하다고 느꼈던 것 같다. 열심히 돈을 벌면서, '황가정'을 이끌어 가는 가장도 불쌍했고, 그 집에서 종업원처럼 일하는 부인도 불쌍했으며, 원치 않는 데 식당을 물려받길 강요당하는 아들과 유학을 가고 싶지만, 딸이라는 이유로 못 가는 딸도 모두 불쌍했다.


'왜 우리는 자신의 존재를 인정받지 못한 채 가족 내에서 모두가 부침을 당해야 하는가? 서로가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는 가족의 모습은 어떤 모습일까?'


이런저런 생각이 내 머릿속을 스쳤다.


연극의 클라이맥스는 단연 무대를 3분할해서, 왼쪽으로는 황택수가 돌아오지 않기를 비는 가족들, 무대 중앙에서 황택수가 돌아오지 못하게 굿을 하는 무당무리, 오른쪽에서 난파된 황택수가 배를 몰고 육지로 가는 장면을 한 번에 연출한 거라고 생각한다. 이 장면에서 배우들의 에너지가 너무 좋아서 아까 장면부터 흘리던 눈물이 계속 멈추지 않았다.


이 3 분할 장면에서부터 내 옆자리 <노숙녀> 분이 드디어 연극을 보기 시작하셨다. 이 장면은 꼭 필요한 장면이었다.


결국 고생하던 황택수는 이름답게 가정으로 돌아왔다. 나는 아마 이 황택수라는 이름이 집 '택' 자에 지킬 '수' 자를 썼으리라 추측했다.


나는 황택수가 무인도에서 가족의 의미를 깨닫고 고생 끝에 집으로 돌아왔기 때문에, 마지막에는 해피엔딩으로 가족을 사랑하는 마음을 내비치겠다고 생각했는데, 결국 황택수는 이런 말을 내뱉었다.


"너희가 이런 식이면 내 재산은 한 푼도 못 줘."


옆에 있던 <노숙녀>님이 코웃음을 쳤다. 황택수에 게 공감하는 눈치였다. 하지만 나는 반대로 느꼈다. 그냥 아버지가 돌아와서 가족들을 좀 더 보듬어 주었다면 모두가 해피 엔딩으로 끝났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연극이 끝나고, 통로 쪽으로 비켜서서 미자 언니를 찾았다. 내 옆에서 연극을 보던 <노숙녀>님이 일부러 나를 팔로 밀치고 지나갔다. 나는 좀 황당했지만, <노숙녀>님 덕분에 내 옆자리가 허전하지 않아 좋았기 때문에 떠나기 싫은 친구의 작별 인사쯤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나는 미자 언니와 김 반장님을 만났다.


"용희 씨, 이 연극도 재밌었지?"


"네, 언니. 저는 이 연극이 지금까지 본 연극 중에 제일 좋았어요. 불편하지 않고, 편안하고. 그냥 옆에서 친한 친구한테 이야기 듣는 기분이었어요. 언니는 어땠어요?"


"나도 좋았어. 무대 3분 할로 쓰는 연출도 특이하고 멋지던데?"


"맞죠? 몰입감 있고, 배우들의 에너지도 폭발하는 것 같고. 멋졌어요. 그 장면은 진짜 잘 만든 것 같아요. 근데 언니도 눈물이 났어요? 저는 눈물이 많이 났는데, 지금 저만 그런 건가요?"


나는 내가 왜 눈물을 흘렸는지 무슨 감정이었는지 잡아내지 못하고 있었고 나만 슬펐던 건지 다른 사람들은 어땠는지 너무나 궁금했다.


“그럼, 슬프지. 가족이라는 허상이 무너지는 건데...”

다른 사람들도 아마 슬펐나 보다.


“근데 용희 씨 내일 연극도 올 거야?”


"내일 연극도 보고 싶은데, 이미 예매가 마감됐더라고요. 아까 물어보니 이미 매진이라 그런지 내일 연극은 현장 배부도 없대요. 아마 일요일 19금 연극에서 봬야 할 것 같아요."


"아, 그래? 그럼 내가 한 번 찾아볼게. 혹시 표가 나오는지..."


나는 그렇게 미자 언니, 김 반장님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마치고, 문예회관을 나왔다.


주차장으로 향하는 길에서 두 사람의 말소리가 들렸다.


"그러니까, 그 하늘이도 자기가 거짓말을 하는지 아닌지 진실을 말하는지 아닌지 아무것도 모르는 거야. 결국 진실은 아무도 모른다는 뜻이지..."


남자분들이 어제 본 연극 ‘빌미'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나는 저분들은 오늘 본 '난파, 가족'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실지 궁금해서 잠시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지만, 꾹 참고 문예회관을 나왔다.




'제 41회 대한민국 연극제 제주'의 다른 연극이 궁금하시다면


기괴하게 기억에 남는 연극 '빌미' 제주 이야기 (brunch.co.kr)

무료로 연극을 보여드려요. '산책' 제주 이야기 (brunch.co.kr)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10. 기괴하게 기억에 남는 연극 '빌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