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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용희 Dec 10. 2023

19. 장군의 자세로 말을 탄 다는 것

"쥬디, 안녕?"


다음 날 나는 센터에서 쥬디를 만났다.


"쥬디야, 어제 만나고 아침에 또 만나니까 반갑지?"


쥬디는 나를 한 번 쓱 보더니 말답게 다시 건초를 먹었다. 쥬디는 오늘도 방금 출근한 직장인처럼 시크하다.


"용희 씨, 오셨어요?"


쥬디랑 놀고 있는데, 이미정 선생님께서 내게 인사를 건네셨다.  


"선생님, 안녕하세요?"


나는 선생님과 반갑게 인사한 후 쥬디에 대해 여쭈었다.


"선생님, 혹시 쥬디는 여기서 자나요?"


나는 방금 출근한 것 같은 쥬디의 모습에 궁금증이 생겼다. 내 질문을 듣던 선생님께서는 이곳의 말들은 모두 들판에서 잔다고 했다.


"말은 풀을 뜯으면서도 움직이는 동물이에요. 말은 위가 작고, 장이 긴 특징이 있어서 먹으면서도 계속 움직여야 해요. 무리 생활을 하고요. 그래서 친구들과 들판에서 자는 걸 더 좋아해요."


"아, 그렇군요. 어쩐지 쥬디가 방금 출근한 느낌이 들었어요."


나는 방금 출근해서 목욕하고, 커피 믹스를 한 잔 타 먹는 모습으로 건초를 즐기는 쥬디를 보면서 선생님께 대답했다.


"방목을 하면 말들이 병도 걸리지 않고, 더 건강해지더라고요. 우울감도 없어지고요. 말은 무리 생활을 하기 때문에 혼자 두면 힘들어해요."


선생님 말씀에 의하면 쥬디는 예민한 말들끼리 따로 잔다고 했다. 아마 쥬디는 생각을 많이 하기 때문에 그 성향이 맞는 친구들이 있는 가보다.


"진짜 신기하네요."


이 곳 말들은 근무 시간에 일하고, 다른 시간에는 들판에서 쉰다. 그래서 인지 말의 표정이 밝은 데 나는 이곳에 올 때 마다 말들이 복지가 좋은 회사에서 일하고 있는 느낌이 든다. 나는 문득 말이나 사람이나 직장생활 하는 건 뭔가 공통점이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쥬디야, 이제 가자."


나는 쥬디를 데리고 마장으로 향했다. 마장 입구에 신선하게 자란 풀을 보자 쥬디는 정신없이 뜯어먹기 시작했다. 쥬디는 신선한 풀을 좋아하는 편으로 숲으로 들어가면 억새 밑에 난초 같이 생긴 풀을 순식간에 잘 뜯어 먹는다. 나는 쥬디가 바짝 마른 건초보다는 촉촉하고 신선한 풀을 더 좋아하나 보다 하고, 어제 좀 먹게 내버려 두었었는데, 그런 내 성향을 아는지 오늘은 마장 앞에 대놓고 서서 뜯어먹기 시작했다.  


나는 사람도 아침에 신선한 과일을 먹듯이 쥬디도 그런가 보다 하고 잠시 먹게 내버려두다가 마장으로 들어오는 다른 분들이 정체되기 시작하자, 뒤에 계신 분께 좀 여쭤보았다. 나는 혹시 너무 예외를 적용하다가 말이 잘못될까봐 걱정스러웠다.


"혹시 말이 이렇게 길에 있는 풀을 뜯어 먹을 때는 그때마다 먹지 못하게 해야 하나요?"


뒤에 계신 분은 나와 쥬디를 보시다가 곧 내게 말씀하셨다.


"먹게 해주셔도 되는데요. 너무 지나치면 나중에 기수를 무시할 수도 있어요."


나는 쥬디와 협력 관계를 유지하고, 쥬디를 내리누르고 싶은 마음은 없었으나 동물이기 때문에 혹시나 내가 서열 아래로 인식되기 시작하면 쥬디를 통제하기 어려워질 것 같아 쥬디 에게 가자는 신호를 보냈다. 승마장 말이니 여태껏 훈련했던 방식이 있었을 텐데 그 틀을 깨는 것도 좀 아닌 것 같고. 쥬디는 똑똑한 말이라 그런지 내 마음을 곧 알아듣고 마장으로 들어왔다.   


"자, 오늘은 말 등에서 등자를 빼고 타는 연습을 좀 해볼게요."


오늘 초보 수업은 이미정 선생님께서 해주시기로 했다. 하희숙 선생님은 마이크를 잡고 트랙 바깥쪽 회원분들 수업을 진행하셨다.


핑크 패딩 입은 분과 나는 말 등위에 올라 등자를 빼고, 기좌와 부조를 배웠다. 기좌는 앉는 자세를 의미하는 데, 기수가 허리를 펴고 체중을 양 좌골에 균형을 맞추고 앉은 뒤 허리를 펴고 무릎 위쪽의 허벅지를 안장에 밀착시키는 자세를 말한다. 이때 정강이도 말의 몸을 살짝 감싸 안듯이 말 몸에 붙인다.


"용희 씨, 왼쪽 다리를 왼쪽으로 더 내리시고요. 전체적으로 몸이 오른쪽으로 기울어졌어요. 왼쪽 어깨를 더 뒤로 젖혀보세요."


선생님 말씀에 의하면 기좌는 말에게 어떤 동작을 취할지 기수의 몸으로 말하는 것이라 한다. 어쩐지, 내가 타면 말이 자꾸 왼쪽 목을 뒤로 꺾고 달린다 했다. 처서는 아예 목을 왼쪽으로 꺾고 달렸고, 쥬디도 가끔 왼쪽으로 기울어져서 달렸었는데, 이제껏 내 자세는 아마도 말에게 목을 왼쪽으로 꺾으라는 신호였나 보다.


"자, 이제는 나무 사이를 다니면서 그대로 평보 연습을 해볼게요."


핑크 패딩 입은 분과 나는 마장 중앙에 있는 작은 편백 숲으로 들어갔다. 계속 등자를 빼고 말 등에 앉아 있으니, 어떻게든 내 몸만을 이용해서 꼿꼿한 자세를 유지해야 말에서 떨어지지 않을 것 같았다.


"일단 머리를 위로 쭈욱 누군가 위에서 내 머리를 잡아당긴다고 생각하시고요. 턱은 아래로 내리시고요. 골반으로 말의 반동을 느껴보세요."


생각해 보니, 이 자세는 사극에서 장군 역할을 맡은 배우분들이 갑옷을 입고 투구를 쓰고 취하는 자세와 같았다. 나는 혼자 내가 장군이 되었다고 상상을 하면서 최대한 몸을 폈다. 아랫배와 허벅지 안쪽에 힘이 엄청나게 들어갔다. 평소 안 쓰던 근육을 쓰려니 오른쪽 발목 복숭아뼈 근처도 뻐근해졌다. 말을 타는 자세는 발목, 무릎, 골반과 제반 근육들이 협응하는 활동 같다. 그 와중에 머리까지 하늘로 쭉 당기고 턱을 내리니 갑옷만 입지 않았지 제대로 장군님이다. 이런 자세를 취하니 말을 타겠다는 내 의지는 더 결연해졌다.


'우리 조상님들은 얼마나 대단한 사람들이야? 이렇게 말을 달리면서 활까지 쏜다고?'


나는 왜 우리 민족이 만주벌판을 호령했었는지 알 것도 같았다. 다리와 몸 만으로 달리는 말을 컨트롤 하면서 활까지 정확히 쏘는 사람들의 신체 협응능력은 어디까지 발달한 것일까?


"용희 씨, 지금 잘 하고 계세요."


만주벌판을 상상하다 보니 저절로 자세가 좋아졌는지 아래쪽에서 이미정 선생님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제 방향 전환을 한 번 해 보겠습니다."


우리가 차를 운전한다고 하면 자체를 입체적으로 생각하게 된다. 말의 움직임도 선이 아니라 입체라고 생각하고 방향 전환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고 하셨다. 고삐만 당기면 말이 가는 게 아니라 가고자 하는 방향으로 말을 끝까지 리드해야 하는 데 내가 말의 중심에 위치하므로 너무 많이 움직이려고 하지 말고 원의 중심에 서 있다고 생각하고 약간만 움직여 주어도 말이 신호를 곧 알아차린다고 한다.  


"부조는 말에게 약속된 신호를 보내는 거예요."


드디어 나왔다. 말에게 신호를 보내는 법. 그게 내가 계속 알고 싶었던 그것이다. 부조.


"부조의 종류에는 다리로 보내는 다리 부조, 상체 반동을 흡수하는 허리 부조, 고삐로 컨트롤 하는 주먹 부조가 있어요. 말을 보내실 때는 다리, 허리, 주먹 순으로 신호를 주시고 말을 세울 때는 정확히 반대로 신호를 보내시면 돼요. 자, 그러면 먼저 말을 보내보겠습니다."


'아... 머리로는 이해가 되는 데 몸이 될까?'


나는 어떻게 해도 쥬디가 나를 떨어뜨리지 않을 거로 알고 있었기 때문에 과감히 쥬디를 보내보았다. 쥬디는 똑똑해서 곧 신호를 알아듣고 살짝 속보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용희 씨, 너무 빨리 보내시지 마시고요. 평보로 한번 움직여 보겠습니다. 그쪽에서 S자로 방향 전환해서 이쪽으로 들어와 보세요."


선생님은 일단 말의 속도를 너무 빠르지 않게 유지하게 하신 뒤 편백 나무 사이를 S자로 움직여 보라고 하셨다.


"말을 보낼 때는 가고자 하는 방향으로 고삐만 당기면서 선으로만 움직이려 하지 마시고... 고삐를 당기면서 몸도 함께 입체적으로 움직인다고 생각하세요."


나는 그토록 알고 싶었던 것을 이제 좀 알겠다. 몸 전체로 말과 통신하는 법. 내 몸과 말과 행동이 말의 정신과 일체감을 느낄 수 있을 때 사람이 말을 탈 수 있는 것이다. 나는 그간의 답답했던 체증이 모두 내려간 듯 마음이 시원해졌다.


"어허, 안돼 쥬디."


내가 잠시 감동에 취해 있는 틈을 타서 쥬디가 갑자기 풀을 뜯기 시작했다. 나와의 통신이 끊어진 틈을 타 쥬디가 돌발 행동을 해버린 것이다. 나는 일단 쥬디를 풀에서 떨어뜨린 후 쥬디 에게 말했다.  


"쥬디야, 근무 중에는 풀 먹으면 안 돼."


생각해 보면 우리도 바이어와 미팅이 있을 때, 그 앞에서 배고프다고 맘껏 간식을 먹을 수는 없다. 나는 쥬디가 나와 협력 관계에 있다고 가정하고 비즈니스 매너에 맞는 행동을 허용해 주고, 아니면 컨트롤하기로 마음을 정했다.


"용희 씨, 말이 풀을 못 뜯게 지금 컨트롤 잘하셨어요."


아래쪽에서 이미정 선생님의 칭찬이 들려왔다. 그래도 선생님께서는 내게 무언가를 더 알려주고 싶으신 듯 말씀을 덧붙이셨다.


"용희 씨, 방금 컨트롤 잘하셨는데요. 그래도 나중에는 쥬디가 풀을 먹으려 하는 마음을 알아야 해요. 그 순간에 고삐가 움직이는 방향을 용희 씨가 읽고, 말이 가려고 할 때 잡아야 합니다. 방금은 고삐 통신이 끊어진 거라 보시면 돼요."


"네."


나는 지금 이미정 선생님의 말씀이 아주 완벽히 이해된다.


"방향 전환을 하실 때는 말 두 귀 사이를 보시고, 그 사이에 시선을 두고 방향 전환을 하신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지금은 그렇게 이해하시고, 나중에 잘 타시게 되면 어디를 보시든 시선은 별로 상관이 없으실 거예요."


나는 전에 <오늘의 선생님>께 시선 처리를 배울 때는 하늘 위쪽 창문 높이로 시선을 멀리 보라는 말씀을 들었었는데, 갑자기 말귀를 보라는 말이 헷갈리기 시작했다.


"선생님, 저 전에는 위쪽을 보라는 말씀을 들었었는데요... 시선은 정확히 어떻게 해야 하나요?"


"아, 그거는 아마 머리가 자꾸 내려가니까 머리를 하늘로 하라고 시선을 위로 주라고 하신 것 같아요."


아, 두 선생님의 말씀을 통합하니 또 이해된다. 머리의 위치는 최대한 하늘로 꼿꼿하게 들고, 시선만 진행 방향으로 말귀를 보라는 말씀 같다.  


"자, 이제 트랙으로 나가서 한 번 달려보겠습니다."


 우리는 마장 중앙 편백 숲에서 빠져나와 트랙으로 나가기 위해 대기 했다. 오른쪽에서 강습을 받던 사람들이 속보로 달려오고 있었다. 우리는 무리를 보낸 뒤 가장 뒤쪽 마지막 순서로 합류해서 속보를 시작했다. 배우고 타니, 힘도 덜 들고 뭔가 좀 잘되는 느낌이다.


신나게 달리고 있는 데, 하희숙 선생님의 방송이 들려왔다.


"용희 씨, 고삐 더 짧게 잡으세요."


나는 달리면서 고삐를 줄였다. 쥬디가 안정적으로 달려주지 않으면 내겐 상상도 못 할 일이다.


"용희 씨, 지금 박자가 이상해요. 용희 씨 일단 앉으시고, 퉁퉁 탁에 일어날게요."


승마는 말의 뒷다리 반동을 내 몸으로 받아서 앞으로 보내줘야 하는데, 뭔가 박자가 계속 맞지 않는 모양이다. 마장 스피커를 통해서 하희숙 선생님의 음성이 들려왔다.


"용희 씨, 용희 씨는 일단 앉으셨다가 다시 일어나 볼게요."


다시 시도해도 뭔가 박자가 계속 꼬이는 것 같다. 선생님의 목소리가 계속 들려온다. 박자만 생각하면서 달리다 보니, 선생님이 이제 수업을 끝내신다는 말씀을 전체 사람들이 한 바퀴만 더 돌고 끝낸다고 잘못 이해해 버렸다.


앞에서 달리던 앨리샤가 갑자기 좌향좌로 섰는데, 나는 앨리샤 뒤쪽으로 쥬디를 몰았다. 나를 따라 달리던 핑크 패딩 입으신 분도 쥬디를 따라 앨리샤 뒤로 따라 들어왔다.


'아...'


노련한 하희숙 선생님은 재빨리 편백 나무숲 쪽 통로를 열고 핑크 패딩 입으신 분을 편백 숲 복도로 보내시고, 쥬디를 앨리샤 옆에 세우셨다.


선생님과 내 표정을 보고 앨리샤 때문에 본인이 잘못하게 됐다고 생각한 쥬디는 속상한 마음에 앨리샤를 공격했다. 나는 앨리샤를 공격하지 못하도록 빨리 쥬디를 막은 뒤 쥬디 뺨을 쓰다듬고 말했다.


"쥬디야, 내가 잘 못 한 거야. 내가 신호를 잘 못 줬어. 너랑 앨리샤는 잘 못 한 게 없어."


그 말을 알아들었는지, 쥬디가 얌전해졌다.


"쥬디야, 너 진짜 똑똑하다."


나는 쥬디의 뺨을 어루만지면서, 기수가 제대로 하지 못하면 말을 얼마나 위험에 빠뜨릴 수 있는지 뼈저리게 느꼈다. 말을 마구간으로 다시 데려오면서 앞으로는 몸과 마음 모두를 아주 날카롭게 쓸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다짐했다.


"용희 씨."


나와 쥬디를 살피러 온 하희숙 선생님이 나를 부르셨다. 나는 지금 뭐가 어떻게 된 건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에 선생님을 보았다.


"선생님, 제가 선생님 말씀을 잘 못 알아듣고 말을 보냈어요. 쥬디는 제 신호를 받고 달린 건데, 앨리샤가 잘 못해서 자기가 잘못하게 된 거로 생각한 것 같아요."


선생님은 내 말을 들으시고는 쥬디의 뺨을 한 번 쓰다듬어 주셨다. 아마 승마장에서 이런 일은 비일비재하게 일어나는 듯하다.


"용희 씨, 다음에 오시면 박자 받는 거 가르쳐 드릴게요. 승마는 박자, 리듬, 균형이거든요."


박자, 균형, 리듬이라...? 그중 과연 내가 알고 있는 것은 무엇이고, 모르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나는 이곳 분들이 모두 친절하고, 분위기도 좋아 이곳에서는 승마뿐 아니라 뭔가 내가 모르고 있는 것들을 편안한 마음으로 많이 배울 수 있을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나는 다음 강습에서 박자 타는 걸 배울 수 있을까? 내가 모르는 것들을 차차 알게 되면 나는 어떤 감정을 또 느끼게 될까? 나는 아마도 배우는 것을 즐기는 사람일까?


나는 문득 나를 알아가는 게 꽤 즐겁단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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