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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용희 Feb 16. 2024

27. 안개 낀 숲에서 영혼을 치유해 보아요.

'안녕하세요? 승마장입니다. 오늘 아침 9시에 수업 예약 있습니다. 조금 일찍 도착 바랍니다. 안개 조심하세요.' 


아침 7시 반, 승마장에서 문자가 왔다.


불길한 마음에 한라산을 바라보니, 300고지부터 위쪽으로는 산이 없어졌다. 


'설마 지금 저거 눈은 아니지?' 


얼마 전 선생님들은 눈 때문에 산 아래에서 부터 눈 속을 뚫고 걸어서 출근하셨다던데, 수업 안내 문자가 온 걸 보니 저 하얗게 낀 것은 눈은 아닌 것 같고... 그럼, 뭐지? 저게 진정 안개인가? 산을 덮은 구름인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일단 하늘을 뚫고 가보기로 했다. 가끔 우리 동네도 안개 속인지 구름 속인지 모르게 뿌옇게 뭔가가 낄 때가 있긴 했어도 평소 그냥 걸어 다닐 때는 별 지장이 없었는데, 제주에 온 지 7년 동안 나는 이런 날씨는 처음인 데다, 이런 때 차를 끌고 나와본 적이 없어서 승마장으로 향하는 길은 좀 긴장되긴 했다. 


말은 타러 가고 싶고, 길은 무섭고... 일단 나가본 도로는 생각보다 앞이 하나도 안 보였다. 평소 공포영화는 보지도 않지만, 뭔가 외국 공포영화에 나올 것 같은 살인 사건이 나기 전 뿌옇고 한 치 앞도 안 보이는 듯한 풍경이 눈 앞에 펼쳐졌다. 


'와, 내가 제주에 와서 이런 안개는 또 처음이네.' 


주로 시내권 등 저지대로 돌아다니는 나는 안개 낀 한라산을 이렇게 직접적으로 넘어보긴 또 처음이었다. 


'새로운 경험이긴 한데, 이거 참 진짜 무섭네.' 


이렇게 짙은 안개는 생전 처음 보는 데, 자동차 헤드라이트를 켜도 앞이 전혀 보이지 않을 정도 였다. 쌍라이트에 안개등까지 다 켜도 앞에 있는 차 브레이크 등만 조금 보일 뿐이었고, 아침 출근길이라 다행히 차가 좀 있어서 나는 앞 차들 꽁무니만 졸졸 쫓아다니다 어쩌다 내가 선두가 되면 도로에 그어진 선에 의지해서 조심조심 방향을 전환해서 거의 기듯이 승마장에 도착했다. 가끔 가장 앞에 선두로 다니던 차들은 뒤차들에 부담을 느껴서인지 갓길에서 옆으로 비키기도 했는데, 나중에 내가 선두가 되어 보니 짙은 안개에는 무조건 선두를 양보하는 게 낫다는 걸 알게 되었다. 길이 너무 안 보이기도 했고, 뒤차들이 많이 따라와서 진심 너무 부담되는 자리였다. 


무사히 도착한 것에 감사했지만, 수업 5분 전에 도착한 나는 앞에 쥬디를 데리고 가는 이미정 선생님을 따라 마장으로 들어갔다. 


"쥬디 안녕? 근데 너 쥬디 맞지?" 


펜스 옆에 서 있는 쥬디 에게 말을 걸었다. 쥬디가 나를 보더니 얼굴을 폭 들이밀었다. 그렇게 쥬디와 많이 대화를 나눠봤어도 쥬디가 마방에 있을 때는 이름표가 있어서 쥬디인 걸 알지만, 이렇게 밖으로 나와서 쥬디를 보면 얘가 쥬디인지, 두성이 인지, 양귀비 인지(다들 비슷한 체격에 짙은 흑갈색 머리) 자신있게 이름을 부르지 못하는 나 자신, 너무 반성 된다. 


그래도 쥬디가 내게 폭 안기듯 얼굴을 들이미는 게 조금은 위안이 되었다고나 할까? 어느새 쥬디와 친해져서 그런지 쥬디가 큰 강아지처럼 귀엽게 느껴진다. 처음엔 말이 넘넘 무서웠는데, 대형 동물에 점차 적응되어 가는 나 자신도, 또한 너무 신기하다. 


"쥬디야, 오늘 안개가 많이 껴서 못 올뻔했어. 너는 밤에 잘 잤어?" 


나는 쥬디 얼굴을 쓰담쓰담 하며 말했다. 사람들은 말의 눈 사이를 쓰다듬어 주면 말이 좋아한다고 알고 있지만, 내 경험상 아주 친해지기 전에 그러는 건 좀 말이 깜짝 놀라는 것 같고, 말이 내 손을 잘 볼 수 있도록 볼을 아래에서 위로 아주 조심스럽게 만져주는 게 서로 부담 없이 친해질 수 있는 방법인 것 같다. 


"아니, 안개가 이렇게 꼈는데, 오늘 우리 승마할 수 있는 거 맞아요? 게다가 오늘 저는 컨디션이 안 좋아서 잘 탈 수 있을 지도 모르겠어요." 


컨디션도 안 좋으시고, 날씨도 안 좋아서 함께 타는 부부 중 아내분이 뭔가 좀 걱정이 되시는 듯했다. 


"그래요? 그러면 오늘은 노래를 들으면서 천천히 해볼게요. 또 타다 보면 몸이 다 풀리니까 괜찮으실 거예요." 


마침 오늘은 다른 수강생들이 오시지 않아, 승마장이 한산하기도 했고 자주 뵙는 부부 분들과 나만 강습에 참석하여 오붓하기도 했으며, 이미정 선생님은 짙게 안개가 깔린 마장에 조용한 요가 음악을 틀어주셔서 몽환적인 느낌을 더해주셨다. 사실 이곳은 마장 한 가운데 자연산 편백 나무들이 곧게 뻗어 있는데, 그래서 인지 더 지금 내가 꿈 속 어딘가에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우리는 천천히 말을 몰았다. 조용하고 평화로운 요가 음악이 나와서 인지 쥬디도 긴장하지 않고 한결 편안한 듯했다. 나 역시 자세나 속도 등등을 생각지 않고, 명상하듯 조용히 말의 움직임에 집중했다. 살면서 이런 걸 어떻게 내가 또 느낄 수 있을까? 뭔가 말로 표현할 순 없지만 내가 쥬디와 함께 삶의 한 자락에서 소중한 기억을 쌓는 듯한 느낌이 들어 갑자기 감사함이 밀려왔다. 


"용희 씨, 오늘 어땠어요?" 


강습이 끝나고 이미정 선생님이 내게 물으셨다. 


"저는 숲에서 명상하는 느낌이라 넘 좋았어요. 쥬디도 좋아하는 것 같아요." 


"저도 아침에 소화가 좀 안 됐었는데, 말 타다 보니 컨디션이 좋아졌어요." 


"거봐요. 말 타다 보면 금방 다 풀려요." 


미정 선생님이 웃으며 말씀하셨다. 나 역시 오늘 아침 승마가 숲에서 쥬디와 함께 뭔가 영혼을 치유받는 듯한 시간을 보낼 수 있어서 행복하고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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