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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용희 Feb 20. 2024

28. 어느새 서로 익숙해진 말과 나

"쥬디야, 이제 봄인가 봐. 너 풀 좋아하지? 풀 좀 먹어볼까?"


마장으로 향하는 길에 내 발목까지 자라있는 풀을 보고 내가 쥬디에게 물었다. 이제 정말 내가 쥬디와 대화할 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신기하게도 '풀 좀 먹어볼까?'하는 말에 쥬디가 바로 길가 옆으로 가서 풀에 코를 대고 킁킁 냄새를 맡으며 걸었다. 


'이러니까 내가 진짜 쥬디랑 말이 통하는 것 같네?' 


내 말을 한 번에 알아듣는 쥬디가 신기하기도 해서 쥬디를 가만 보고 있자니, 쥬디는 풀이 좋지만 자기가 좋아하는 크기가 있는 듯이 풀을 막 뜯어 먹지는 않았다. 


"네가 좋아하는 크기가 되려면 아직 더 자라야겠지?" 


쥬디가 좋아하는 풀의 질김 정도가 있는 걸까? 나는 야채를 먹을 때 새순이면 연해서 더 좋아하는 데, 쥬디는 껌 씹듯 풀도 질겅질겅 씹어먹기에 좀 씹는 맛이 있는 질긴 풀을 선호하나 보다. 아마 초여름이 되어 풀이 내 정강이 높이까지 올라오면 쥬디는 그때 먹을 것 같다. 작년 가을에도 그랬듯이.


"쥬디야, 오늘은 날씨가 엄청 따뜻하다. 나는 잠바를 벗고 타도 되겠는걸." 


어느새 따뜻한 날씨에 기분이 좋아진 나는 쥬디에게 쫑알쫑알 말을 걸면서 검은 잠바를 벗어 펜스에 걸었고, 기승 준비를 마친 후 말에 올라탔다. 내 모습을 보시던 미정 선생님이 급히 달려오셔서 내게 말을 걸었다. 


"용희 씨, 지금 말도 죽이고, 사람도 죽이려는 겨?"


나는 무슨 말인지 몰랐지만, 쌤이 워낙 내게 장난을 잘 치셔서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일행을 따라 출발했다. 


오늘은 우리 승마장에 신입 회원 남자분이 새로 오셨다고 한다. 그 분은 완전 초보는 아니시고 기승 횟수가 좀 되셔서 내 앞에서 '두성이'라는 이름의 말을 타고 달리시기로 했다. 잘은 모르겠지만, 일렬로 달릴 땐 가장 잘 타시는 분이 제일 앞에, 그다음 잘 타시는 분이 가장 뒤에, 그리고 두 번째부터는 잘 타는 순서대로 타는 것 같다. 앞뒤 두 분을 제외하고 실력이 비슷하다면 중간은 혹 말의 서열순서일지도 모르고...


그래서 어쨌든 오늘 우리는 부부 분 중 남편분이 가장 선두에 서고, 아내 분이 가장 뒤, 두성이가 두 번째 내가 세 번째, 그리고 스타가 어떤 여성분을 태우고 네 번째로 달리기로 했다. 


"오늘은 신입 회원분이 오셨어요. 모두 반겨주시길 바랍니다. 앞으로 이 시간에 여러분과 계속 함께 타실 거예요. 자 박수." 


스피커를 통해 이미정 선생님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우리는 밝은 마음으로 신입 회원분을 반겨드렸다. 자 그러면 평보부터 시작하겠습니다. 


요즘 나와 쥬디는 합이 잘 맞아, 특별히 많은 통신을 하지 않아도 그냥 서로서로 잘 달린다. 다만 내가 아직 골반이 왼쪽으로 삐뚤어져 있어서 쥬디 머리가 왼쪽으로 기울어져 가는 것만 빼고는. 아마 오른쪽 발목에 힘이 생기면서 몸을 바르게 지탱할 수 있으면 쥬디 머리도 트랙을 바로 달릴 수 있겠지?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트랙을 도는 데 오늘은 신입 회원분이 오셔서 서로 합을 맞추느라 빨리 달리지는 않는 눈치였다. 원래 부부 분들과 나만 있을 때 세게 달리시면 나도 따라서 막 달리기도 하는데, 그 점이 좀 아쉽긴 했지만 앞으로 새로운 분과 합을 맞추려면 천천히 달리는 게 더 안전했기에, 이참에 나는 쥬디의 머리를 최대한 트랙 가운데로 달리게끔 하려고 오른쪽 발목과 고관절에 신경 쓰며 트랙을 돌았다. 


"자, 다들 잘하시네요? 그럼, 속보를 해보겠습니다." 


서로 간의 합이 슬슬 맞아가자, 선생님께서는 속도를 높이라고 하셨다. 나는 요즘 속보도 제법 자신이 있어져서 전처럼 무서워하면서 달리지는 않고, 달리는 속도가 늦으면 생각 없이 멍하니 트랙을 달릴 때도 있다.  


오늘이 좀 그런 날인 것 같다. 무념무상으로 트랙을 도는 날. 


한참을 돌고 있는데, 앞에서 두성이가 빠른 속도로 후진해 왔다.


"꺅?" 


나는 너무 놀라 쥬디의 고삐를 뒤로 세게 잡아당겼다. 두성이의 엉덩이와 쥬디의 얼굴이 부딪치는 순간은 상상만으로도 끔찍했다. 쥬디가 서열이 높을지 두성이가 높을지 잘 모르지만, 보통 서열 높은 말이 낮은 말을 잘 공격한다고 하는 데, 쥬디가 혹시 두성이보다 서열이 높다고 하더라도 빠른 속도로 달려와서 뒷발차기를 한다면 쥬디 얼굴이 어떻게 될까? 


"꺅!" 


짧은 순간이었지만, 내 뒤에 계시던 스타를 탄 여성분도 비명을 질렀다. 순식간에 말 3마리가 후진하는 상황이 되었고, 쥬디도 갑자기 후진하게 되어 내 뒤의 여성분도 놀란 눈치였다. 이번 건은 내가 쥬디를 잘 통제했다기보단 쥬디가 알아서 상황판단을 잘하고 충돌을 피한 눈치다. 


"두성이는 고삐를 너무 세게 당기지 마시고, 살살 세심하게 써주세요. 용희 씨. 용희 씨는 앞말과 안전거리 유지하면서 달려주세요." 


"네." 


다들 기승 횟수가 좀 되기도 했고, 선생님들도 워낙 베테랑이셔서 말 후진 사건에 별다른 문제는 없었고, 나는 그 뒤로는 앞말과 안전거리를 적정하게 유지하며 달렸다. 좀 달리다 보니 쥬디는 안전거리를 유지하느라 심심한지 왼쪽 이빨로 껌을 씹듯이 고삐를 질겅질겅 씹으며 달리기 시작했다. 나 역시 쥬디를 보다가 집중하지 않는 쥬디가 너무 웃겨서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용희 씨, 뭐가 그리 웃겨요?" 


"쥬디가 딴짓하면서 달리는 게 넘 웃겨서요." 


쥬디도 나도 이제 서로에게 많이 익숙해졌나 보다. 그냥 막 이렇게 달리다니...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내가 말에 올라타면 쥬디도 긴장하고 나도 긴장해서 이런 건 상상도 못 했었는 데. 


선생님의 말씀에 의하면 좌속보를 하면 초보자는 살이 많이 빠지고, 그 초보자를 태운 말도 긴장해서 살이 많이 빠진다고 한다. 또 사장님은 사람이 잘 타는 날은 말도 편하고 사람도 편할 때가 있다고 했다. 지금 보니 오늘 쥬디는 이제 내가 별로 불편하지 않은 눈치다. 물론 나만의 착각일 수도 있지만... 


그렇게 수업을 마치고, 말 등에서 내려오는 데 미정 선생님이 내게 오셔서 말씀하셨다. 


"용희 씨. 옷 제가 챙겨갈게요." 


"앗, 쌤. 옷을 펜스에 걸면 안 되는 거였어요?" 


"그럼요. 옷을 이렇게 걸어놓으면 트랙을 돌 때마다 말이 놀라고 놀란 말이 날 뛰면 사람도 놀라고요. 다들 놀라죠." 


"아, 그러니까 오늘 제가 검은 색 허수아비를 트랙에 설치했던 거였네요?"


우리도 벽에 뭐가 붙어있으면 깜짝깜짝 놀라는 데, 겁이 많은 말이 트랙을 돌다가 펜스에 검은 물체가 있으면 얼마나 놀랐을까?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나는 그 뒤로 옷은 꼭 마굿간 옷걸이에 걸어놓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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