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동창 녀석이 우스갯소리로 얘기하길래 같이 웃고 말았다. 한철이, 세철이란 이름을 대면서 셋이 모이면 재밌겠다며 하는 농에 내가 생각해도 웃음이 나와 정말 그 이름들이 있기나 하냐고 되물었었다.
집에서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부친이 마음먹은 대로 이름을 지었다면 아마도 조금 더 어색한 이름으로 살고 있거나 또 다른 이름으로 살고 있을 것이다. 아버지 대에는 큰 대 大자 항렬이라 아버지와 숙부님들 이름 끝자리가 같고 그 아들 대에는 가운데 中 자라 사촌들은 모두 비슷한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삼형제 중 막내인 아버지는 웬일인지 당신 자식들에게 항렬과 무관한 이름을 붙여 주셨다. 하마터면 내 이름은 '평도'가 될 뻔하였다. 고등학교 이학년때 친구 녀석에게 얘기했더니 그 이름이 뭐냐고 코웃음 치길래 ‘그게 어때서….’ 라며 한참이나 말씨름하였다. 나하고 같은 성씨를 가졌기에 무슨 파 몇 대손이니 항렬이니 하는 것으로 둘 다 모르는 얘기로 한참이나 실랑이를 한 것이다.
아버지는 왜 관례를 깨고 당신 뜻대로 하셨을까?
1980년대 초반, 하루에 한 번 버스가 다니는 시골 마을, 작은 집성촌에 살고 계셨던 아버지는 가재도구라고도 할 수 없는 살림살이 몇 개와 젊은 아내, 서너 살 무렵의 아들을 데리고 구불구불한 산길을 걸어서 어둑어둑한 시골 마을을 떠났다. 그 시절이 맞는지 모르겠지만 컴컴한 길을 울면서 내려간 기억이 아직도 나에겐 선명히 남아있다. 우리집을 마련하기 전까진, 당신 세대의 많은 이들이 그러하였듯이 불편한 셋방살이를 하였다. 어머니는 어린 자식이 마당에 서서 주인집 안방의 흑백 텔레비전 만화를 보거나 ‘김일’이 나오는 프로 레슬링을 보려 할 때 들렸던 방문 닫히는 소리를 아직도 얘기하시고, 먹을 것이 없어 국밥이며 밀가루 수제비를 많이 해 준 게 마음에 걸렸다고도 자주 말씀하셨다. 방문이 닫히며 내었던 거친 소리는 기억나진 않지만 지금도 즐겨 먹는 콩나물국밥을 볼 때마다 밥알을 찾아보기 힘들었던 묽게 쑤어진 국밥이며 떼어낸 모양이 제각각이었던 수제비 한 그릇이 오래된 낡은 흑백영화의 한 장면처럼 가끔 떠오른다. 아련함이 묻어 있는 그 음식들은 알에서 갓 깨고 나온 어린 새들에게 각인되는 어미 새 부리의 붉은 점처럼 항상 어머니를 떠올리게 하였다. 농사도 적당히 있고 어업을 하는 배도 있었던 그리 가난하지는 않았던 집안의 셋째 아들이었지만 시내와는 한참이나 떨어져 있었고 전기도 제대로 들어오지 않는 시골에서 작은 꿈조차 꾸기 어려웠던 현실을 떨쳐내고 싶지 않았을까?
빈손으로 나와 거친 일을 하며 사글셋방에서 전셋집으로 그리고 몇 년 뒤 당신 손으로 직접 집을 지어 이사 들어간 날 아주 많이 기뻐하셨던 아버지, 꿈과 희망 같은 거창한 단어가 아니더라도 삶을 관통하는 굳건한 의지 하나는 자식들에게 물려 주신 나의 아버지.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그 공간과 단절함으로써 당신의 인생을 시작하셨고 그런 의지를 자식들 이름에 투영하지 않았을까? 나와 내 남동생은 사촌들과 운율 하나 맞지 않은 이름을 가지고 있지만 누구 앞에 내어놓아도 부끄럽지 않은 이름으로 살고 있다. 친구의 작은 농 하나에 되짚어본 고마운 나의 이름 석 자.
먼 훗날 나의 자식들도 자기 삶에 어울리는 좋은 이름을 아버지가 주셨다고 말 할 수 있으면 좋겠다.
딸아이가 그려준 나의 얼굴
필명으로 쓰고픈 나의 다른 이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