녀석을 처음 본 날 깜짝 놀랐다. ‘코넬리아 드랑예 증후군 Cornelia de Lange Syndrome’ 1933년 네덜란드 의사 코넬리아 드랑예가 처음 보고한 증후군으로 여러 장애를 가지고 태어나지만 특히 양쪽 눈썹이 붙어있는 것이 옛날 TV 프로그램 ‘쓰리랑부부’에서 ‘순악질여사’ 의 눈썹을 상상하면 바로 그것이다.
아기가 나올 것 같다는 산부인과의 연락에 서둘러 분만실로 올라갔다. 간호사가 녹색 천에 아이를 안고 보여 주었다.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발달이 더디고 경련하여 방문하였던 이름조차 생소한 병을 가진 아이가 바로 저런 얼굴이었다. 눈썹이 일자로 붙어있고 뭐랄까 늑대 같은 얼굴을 가진 것이 그랬다. 너무 놀라, 말을 잇지 못하고 있으니 아기를 안고 있던 간호사가 얼굴을 다시 한번 닦아 주었다. ‘휴…’ 그제야 멀쩡한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양수 때문이었다.
출생 신고하면서 동사무소 공무원에게 물었다.
“셋째 아인데 혹시 제공되는 혜택이 있나요?”
“……, 서류접수 잘되었습니다.”
아무렴 어떠랴, 내 아이 내가 잘 키우면 되지.
녀석의 척추에는 성능 좋은 수평계가 장착되어 있었다. 안아서 흔들흔들 흔들어 주다 이부자리에 눕히면 감당할 수 없는 울음이 시작되었다. 다른 방법이 없었다. 수평에서 약 15도 정도 경사가 되게 머리 쪽을 들고 왔다 갔다 하면 금세 잠드는 것이 그렇게 천사일 수 없었다. 그러다가 다시 잠자리에 뉘면 어느새 알아차리고 울기 시작하는 것이 꼭 수면 주기가 '얕은 잠에서부터 REM 수면까지' 몇 차례 반복되는 것 같이 밤새 계속되었다. 아이를 눕힐 이부자리를 하나 사 왔다. 하늘색 바탕에 미키마우스가 웃고 있는 푹신한 솜이불이었다. 그 이불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나이가 들어가면서 수면 패턴이 안정된 것이었지 알 순 없지만, 평화의 시간이 그렇게 찾아왔다. 그 미키마우스 이불은 초등학교 가기 전까지 아이의 잠자리를 지켜오다 초등학교 가면서 퇴역하였다.
한참을 잊고 있다가 큰아이들이 다른 도시로 학교에 가게 된 후 미키마우스 이불은 부활하였다. 가끔 집에 오거나 방학 때 왔다가 한동안 머무르게 되면 막내 녀석이 사용하던 그 작은 이불이 누나들의 보금자리 역할을 톡톡히 하게 된 것이다.
아이들이 다시 올라가고 나면 그때는 내 차례가 된다. 요즘 같은 더운 날씨엔 더욱더 쓰임이 많다. 거실에 그 파란 미키마우스 이불을 깔고 누워 있으면 침을 흥건히 흘리면서 보행기를 밀고 다니던 어린 모습이 떠오른다. 녀석의 할아버지 할머닌 침 많이 흘리면 똑똑하고 머리가 좋다는 말씀을 자주 하셨는데 그 예언 또는 주문의 결과가 어떨지 4개월 뒤, 11월이면 알 수 있을 텐데 생각만 하여도 가슴 떨린다.
훌쩍 커버린 마법 같은 이불의 옛 주인이 누워 있었다. 발끝이 이불 밖으로 삐져나와 있는 모양에 무슨 까닭인지 그리스신화가 떠올랐다. 프로크루스테스란 악당이 침대에 맞게 긴 사람은 잘라서, 작은 사람은 늘려서 죽이다가 테세우스에 의해 머리와 다리가 잘려 죽는 그런 얘기인데 나는 침대나 이부자리 밖으로 나와 있는 무엇을 보면 왜 그 이야기가 떠오르는지 모르겠다. 물론 자기 방식대로 타인을 재단하지 말라는 교훈을 담고 있긴 하겠지만, 굳이 연관시킨다면 저 아이는 악당보다는 테세우스의 영웅적인 행보를 닮았으면 좋겠다 정도일 텐데 테세우스의 비극적인 결말을 생각한다면 그것도 아니다. 아마도 어릴 적 영웅의 서사에 푹 빠져 읽고 또 읽은 것이 각인되어 그 이미지가 투영된 것인지 모르겠다.
아내는 이제 그 이불을 버리자고 하였다. 자고 일어나서 허리가 아프다고 몇 번 얘기했더니 저 미키마우스도 떠나보낼 때가 되었다는 것이다. 하기야 18년을 같이 나이 들어왔으니 미키마우스도 또 그 밑에 깔린 솜도 자기 갈 곳을 찾아갈 때가 된 것이겠지. 그런 것이겠지. 왠지 마음이 아려왔다. 이불 위 미키마우스만 하였던 아이는 훌쩍 커버려 그 이불을 떠난 지 오래되었고 나와 아내는 그 이불 위에서 또 십 년을 보냈는데 이제는 정말로 미키 마우스를 자기 갈 곳으로 보낼 때가 된 것이다.
Goodbye, 미키마우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