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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대니보이 Jul 01. 2022

커피 향에서 ‘관성의 법칙’을 본 날

 

  맑은 하늘 한번 볼 수 없는 날이 도대체 며칠째인지. 일기예보 앱에는 오늘도 비가 오락가락한다고 말했고 회색 태양은 찡그리고 있었다. 어느 순간 쇠창살 같은 빗줄기가 열리고 잿빛 하늘도 민낯을 드러낸 오후. 통영 정량동 언덕배기에 앉은 커피집으로 차를 몰았다. 


   있을 것 같지 않은, 전해 듣지 않고서는 알 수 없는 곳에 용감하게 자리 잡은 그 집에서 부드럽게 파도치는 갈색 머리칼에 작은 웃음 잃지 않는 주인장을 만났다. 기다란 나무 테이블엔 이미 한 가족이 모여 향긋한 내음을 사이에 두고 얘기를 나누고 있었고 왼쪽 창가 작은 사각 테이블에 앉은 은발의 할머니는 커피 향이 보초병처럼 그 공간을 지키고 있는 듯 외부의 작은 소음에도 흔들리지 않는 우아한 자세로 책을 보고 있었다. 좋아하던 중앙의 너른 테이블을 놓쳐 옆 원탁에서 기다렸다. 금세 그 자리가 비어 얼른 정리해 달라고 재촉하고선 옮겨 앉았다. 


   ‘에티오피아 예가체프 아리차’ 달콤한 향이 테이블 너머 서둘러 달려 나왔다. 하얀 찻잔에 담겨온 알싸하고 달콤한 향이 코끝을 타고 입안 점막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커피 한 모금을 살짝 빨아 당기고 머금었다가 멀리 보냈다. 가벼운 산미가 입안 가득 점령했고 뒤따라 알싸한 감칠맛이 혀끝을 감쌌다. 달콤하고 부드러운 커피 향과 여러 맛이 섞인 알싸한 맛의 이단 콤보 공격에 꿉꿉하고 궂은 날씨 덕에 주저앉아 늘어져 멀리 떠나 있던 의식들이 또렷해지면서 제 자리를 잡고 머릿속 공장을 돌려 엔돌핀 endorphin을 마구 만들어 내어 약간은 유포릭 euphoric* 해졌다. 뭔가 몽환적인 안개 속에 있는 느낌이 드는 순간 두 달을 마시고 있던 캡슐 커피 맛이 떠오르지 않았다. 한 달에 두세 번은 여기서 볶아준 커피콩을 배급 받아 아침저녁으로 드립 해 마셔오다 지난 두어 달은 건너뛰었는데, 어제까지 먹던 그 맛이 기억나지 않는 것이다. 


   사람 입맛은 간사하다고 하더니 참말인가 보다 생각이 드는 순간 머릿속에 ‘관성’ 이란 단어가 들어왔다. 사전적 의미는 ‘외부에서 힘이 가해지지 않는 한 모든 물체는 자기의 상태를 유지하려고 하는 것.’이었다. 캡슐커피를 마셨던 훌륭한 스페셜티 커피를 마시던 적당한 시간이 지나 그 상황에 길들여져 방향을 바꿀 수 있는 자극이 없다면 같은 커피 맛만 기억하게 되는 것이 인간의 속성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커피 향 하나에 무슨 큰 의미를 둘 필요는 없겠지만 삶도 그런 것이지 않을까? 


   한 걸음씩 나아가는 하루하루에 뒤틀려 어지러운 것들은 잊어버리고 좋은 향과 풍부한 맛이 있는 곳으로만 향하는 그런 '관성'으로 살아가는 삶이었으면 좋겠다. 은은한 향이 담긴 커피콩 봉지를 건네받고 돌아 나오는 길, 친구는 웃으며 손 흔들어 주었다. 


*euphoric : 극도의 행복감과 희열을 뜻하는 euphoria의 형용사.

커피를 마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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