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채만 한 상선을 모는 선장님과 얘기를 나눴다. 한 달 이상 항해하다 계약된 항구에 닿아 두세 밤 머무르면서 땅도 밟고 흙냄새도 맡아가며 재충전하게 되는데 그것이 힘들게 되었다고 하였다. 코로나가 문제였다. 항구에 들어가도 상륙 허가를 내주지 않아 화물만 항구에 내리고 생필품을 보급받고는 그게 끝이었다.
"이번에 입항하면 휴가 보내시겠네요. 푹 쉬고 가셔야겠습니다."
"그래야죠, 많이 힘들었습니다."
"휴가가 며칠이나 되나요?"
"이번엔 80일입니다…"
두 달 반이 넘는 휴가였다. 아주 짧은 쉼표 뒤 이야기를 이어갔다.
"제가 7개월을 바다에 떠 있었어요, 육지에 내리지도 못하고."
7개월을 쉬는 날 없이 바다에 떠 있는 게 어디 쉬운 일인가?
오래전 부산에서 배를 타고 '동남아 순회공연'을 한 적이 있다. 부산, 싱가폴, 마닐라, 괌, 일본을 거쳐 부산으로 돌아오는 한 달간의 공무상 출장이었다. 첫 해외 나들이를 배로 하게 되었다. 선원수첩을 손에 쥐고 길이가 백 미터 남짓 되어 보이는 거대한 배에 올랐다. 빠른 속도가 아니었기에 파도가 심한 날 아니면 멈춰서 시동만 켜놓은 자동차 위에 있는 느낌이었다. 그렇게 팔 일을 달렸다. 비행기로 여섯 시간이면 넉넉한 거리를 팔 일 만에 싱가포르 부두에 도착할 수 있었다. 선장실에서 종이 울렸고 나를 포함한 다섯 명 정도 파견 나온 인사들이 선장실에 모여 앉았다. 해양대학교 출신의 풍채 좋은 선장은 다음 날 저녁 배에서 열리는 리셉션에 참석해달라는 당부와 함께 일정을 간략하게 말해주었다. 오래전 일이라 그때 날씨며 분위기는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신기했던 경험이 아직도 선명히 남아있다. 외부 인사 중 젊은 축에 속하는 내가 앞장서서 배에서 내렸다. 후덥지근한 대기에 실려 온 육지의 흙냄새, 올리브 가지를 물고 온 노아의 비둘기보다 더 반가웠다. 성큼성큼 두어 걸음 나섰다. 갑자기 몸이 울렁울렁, 땅이 흔들흔들했다.
"한꺼번에 쉬시는구나, 상륙하면 멀미하겠습니다."
"땅멀미, 말씀하시는군요, 저는 그 정도는 아니고 땅에서 걸을 때 더 피곤하긴 합니다."
이십 년 넘게 겪은 그는 아직도 힘들다고 하였다. 육지의 기준으로 보면 시속 30km도 안 되는 속도로 달리던 배 안에서 잘 지내다가 육지에 발을 딛는 순간 느끼는 어지럼증을 땅멀미 또는 상륙증후군(Male de debarquement syndrome)으로 부르고 있었다. 사람의 평행기관이 그 정도의 속도와 출렁거림에 적응하여 느끼지 못하고 있다 멈춰 서 있는, 아니 멈춰 있다고 생각하던 육지에 내리는 순간 잊고 있던 지구의 자전을 온몸으로 느끼게 된다. 땅 위에서 시속 1,300km 속도, 실감 나지 않는 이 속도를 일 초로 얘기하면 아찔하다. 무려 일 초에 368m, 소리의 속도인 마하보다 더 빠르게 달리고 있는데 그것을 모른 채 평생 살 뻔하였다.
이런 생각이 들었다. 600만 년 전 오스트랄로피테쿠스에서 시작된 진화의 씨앗이 현생인류의 시조인 호모사피엔스를 거쳐 나에게까지 이어졌다. 그 무한하다고까지 할 수 있는 세월 속에서 인간은 변화하고 적응하여 살아남았다. 그러나 일주일 남짓 바다에 떠 있었을 뿐인데, 적응하였다고 믿은 지구의 자전 속도에 배신당하고 드러눕게 되었으니 사람의 적응이란 것이 이렇게 허망할 수 있을까.
읽었던 책 한구절이 생각났다. 약 이천 년 전 로마의 시인 호라티우스는 ‘인생은 짧다, 희망을 크게 가지지 말라, 우리가 이야기하고 있는 순간에도 시샘하는 시간은 지나가나니, 오늘을 잡아라. 내일은 최소한만 믿어라.’라고 얘기하였다.
‘오늘을 잡아라 Carpe diem !’
어쩌면 영원이라고도 여길 수 있는 시간 동안 적응하지 못한 한 귀퉁이 남긴 것이 인간이다. 그러나 나약하면 어떻고 허망하면 어떠랴. 몇만 년 넘게 이어진 유전자로 이렇게 살아남았으면 된 거 아닌가. 싱가포르 흔들리는 땅에서 비틀거리는 서로를 의지하며 마셨던 타이거비어가 생각났다. 나는 그 ‘오늘’을 즐겼다. 그리고 오늘이 쌓이고 모여서 오늘의 ‘나’가 되었다.
며칠 뒤 선장님에게서 연락이 왔다. 후임자가 코로나 걸려서 한 달에서 석 달 동안 더 바다에 떠 있게 되었다고. 위로의 말씀을 건넸다. 그래도 나는, 오늘 저녁 시원한 맥주 한잔 들고 단단한 육지에서 야구를 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