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로 후비듯 날카로운 두통이 하루에도 몇 번씩 찾아왔다. 진통제 몇 알에도 꼼짝하지 않는 통증은 며칠이 지나고야 희미해졌다. 이깟 고통이야, 십수 년 동안 오로지 이날을 위해 달려온 아이 가슴에 매달린 앞날에 비할까?
수능을 보고 온 날 제 방에서 정답과 맞춰 보던 아이는 먹고 싶다던 닭발을 주문해서 맛있게 먹고 그동안 못했던 게임을 한다고 컴퓨터 앞에 앉아 있었다. 나와 아내는 묻지 않았다. 루비콘강을 건너던 카이사르는 아닐지라도 이미 제출된 답안지며 자소서를 어찌할 수 없기에 최선을 다해 면접을 준비하고 결과를 기다리는 일만 남았다.
아침 7시 40분까지 면접 장소에 들어가기 위해 하루 전날 움직였다. 숙소에 짐을 풀고 미리 봐둔 소고기 국밥집에 들어갔다.
“고추가 맵지 않나요?”
매운 고추를 좋아하지 않는 터라 주인에게 물었더니 아삭 고추라 맵지 않을 거라고 했다. 근엄한 표정의 면접관들도 아삭아삭하기를. 긴장한 티를 내지 않으려는 듯 유난히도 맛있게 먹는 아들. 아이를 보는 내내 나도 모르게 가슴이 뛰었다.
새벽 5시 30분. 알람이 울리기도 전에 아이를 깨웠다. 김 가루 듬뿍 뿌린 콩나물국밥을 먹고 서둘러 나섰다. 생각보다 일찍 도착했나 싶었지만, 대학교 안 주차장은 이미 꽉 차 있었다. 우리보다 더 마음 졸인 부모들이 거기 있었다. 아이는 수험표를 받고 웃으며 강당으로 들어갔다.
198x년 11월 20일. 시험장인 여고 교문 앞에서 후배들이 쥐여 주던 하얀 찹쌀떡 가루 날리던 그날이 생각났다. 내 관상을 봤는지 답안을 보여 달라는 뒷자리 녀석에겐 썩소를 날리고 몰입의 시간을 보냈다. 묵직한 성적표와 장래 희망을 이룰 수 있는 원서를 샀다. 그렇게 삶이 시작되었고 그렇게 세월이 흘렀다.
흰 머리카락이 어색하지 않을 즈음 어렸던 내가 둥지를 떠나왔듯 나의 아이도 둥지를 떠나려 하고 있다. 면접이 끝나고 다섯 시간 뒤에 만난 아이는 훌쩍 커 있었다.
일찍 잠든 아이를 돌아보고 거실에 앉았다. 아내는 눈물을 흘렸다.
“이십팔 년 만에 아이들 다 키웠네요.”
“식탁 아래에서 보일 듯 말 듯 걸어 다니던 게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저리 컸네요.”
아이들 키운 그 세월이 스쳐 지나가는 건지 아니면 빈 둥지가 되는 것을 실감하는지 아내의 눈물에 나도 짠해졌다.
“우리도 그렇게 자라서 집을 떠났고 가정을 이루고 살아왔잖소. 우리 아들도 이제 제 삶을 살기 위해 한 발 내딛는 거니 울지 맙시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얼마 뒤면 집을 떠날 자식 생각에 벌써 허전함이 느껴졌다.
어머니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유학 보낸 아들 생각에 내가 좋아하던 칼국수를 일 년 동안 드시지 않았다고 하셨다. 밀가루만 봐도 아들 생각에 눈물이 흘렀다고. 저 녀석은 뭘 좋아하나?
“합격하면 우리도 십 년은 라면 안 먹고 버텨봅시다.”
하루 세끼를 라면이며 국수로 채워도 좋다고 하는 녀석이니 아내가 그러자고 하면 어쩔 수 없지 않겠는가? 울다가 웃는 아내를 보니 아픈 머리가 한결 개운해졌다.
자식을 들여보내고 추운 바깥에 서서 간절히 기도하던 모든 학부모께 기쁜 소식이 닿길 기원한다. 물론 우리 집에도 그러리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