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 정말 애썼다
뚜뚜뚜뚜. 부북.
브레이크를 밟았지만 늦었다. 차에서 내려 확인했더니 차 왼쪽 뒷부분을 긁고 말았다. 그래도 자꾸 웃음이 나왔다.
아버지 생신이라 통영 서호시장 <만성복집>에서 졸복을 먹었다. 연신 시원하다 말씀하시며 드시는 모습에 마음이 아렸다. 몇 해 전 쓸개를 잘라내는 수술을 하신 아버지는 하루에 한 끼 반 정도만 드신다고 하셨다. 아들을 기다렸을 아버지는 국물 하나 남기지 않고 맛있게 드셨다. 내 속도 뜨뜻해졌다. 식사를 마치고 옆 생선가게에서 한겨울 제철인 물메기 한 마리를 골랐다. 삼만 원이라는 말에 너무 비싸다며 주저하시는 아버지 발걸음을 잡아당겼다.
"내일 뜨끈한 메기국 끓여 드세요."
잘 손질한 물메기 한 마리를 손에 들려 드리고 돌아섰다. 엘리베이터가 닫힐 때까지 쳐다보시던 아버지께 손 흔들며 집으로 돌아오는 길. 차창 밖 보이는 따스한 햇볕에 콧노래가 나왔다.
햇볕을 흩어 놓는 전화벨 소리. 정신이 번쩍 들었다.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아들이 전화할 이유는 하나뿐이었다. 수화기 너머 떨리는 아들 목소리에 눈물이 났다. 잠긴 목소리로 어린 아들에게 얘기했다.
“아들, 정말 애썼다. 사랑한다.”
원하는 대학에 합격했다는 소식을 전하는 아이는 오히려 덤덤했다. 하지만 전화를 끊고 달리는 내내 마음이 먹먹했다. 고인 눈물이 마르지 않았다. 초등학생 때부터 과학을 좋아하던 소년이 꿈을 잊지 않고 10년을 걸어서 출발점에 서게 되었다. 이제 둥지를 떠나 자기 삶을 찾아 길을 나설 아이 생각에 기뻤다. 허전한 마음이야 생기겠지만 엊그제 아내에게도 얘기했듯 우리도 그렇게 떠나왔고 그것이 삶이기에 허전한 마음은 마음 속 비밀금고에 서둘러 넣었다.
가슴 벅찬 기쁨으로 주차장에 들어섰다. 들뜬 마음 때문이었는지 요란하게 울렸던 소리는 차를 뒷기둥에 긁고 나서야 들렸다. 차에 남겨진 상처를 보았다.
아버지 생각이 났다. 학력고사 성적을 확인하고 점수에 맞춰 대학을 지원하는 시스템이었던 그때 그 시절. 생각보다 좋게 나온 성적 덕분에 중학교 통지표에 적힌 장래 희망을 이룰 수 있었다. 며칠만 기다리면 집 앞에서 전국의 대학 입학원서를 살 수 있었다. 하지만 막무가내로 서울 가서 원서를 사 오겠다는 아들을 보며 그때 아버지는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
12월 31일. 밤늦게 도착하여 고등학교 2학년 때 서울로 전학 간 친구 집에서 하룻밤을 잤다. 다음 날 아침, 시골뜨기의 상경을 축하하는 건지 온 세상이 새하얗게 피어 있었다. 원서를 사기 위해 도착한 서울의 그 대학은 1월 4일부터 원서를 판매한다고 했다. 1월 1일부터 1월 3일까지 공휴일이었던 시절, 고등학생 둘이 그걸 알 턱이 없었다. 허탕 치고 발걸음을 돌려 눈바람 뚫고 도착한 나의 모교는 원서를 판매하고 있었다. 억지 서울 여행을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와 서류를 채워 넣었다. 간절한 마음도 함께 담았다.
법대에 가길 원하셨던 아버지께 자연반이라고 말씀드리며 의대에 원서를 넣었다. 합격자 발표날 떨리는 손가락으로 차가운 공중전화 숫자 버튼을 눌렀다. 몇 번의 시도 끝에 학교에 연결되었다. 수화기 너머 들려온 복음 같은 소리에 만세를 불렀다.
어렴풋한 기억 속, 아버지 두 눈에 물기가 어렸었다. 그때 아버지도 지금의 나처럼 아들의 합격 소식은 말할 수 없는 성취 중 하나였을 것이다. 마음 한편에 뒷바라지 걱정도 있었을 테지만 자식의 합격 소식에 아버지도 오늘의 나처럼 기뻤을 것이다.
아버지는 최근에야 그때 이야기를 하셨다. 시장에서, 바다에서 험한 일 하며 힘들게 먹고 살던 시절이었는데 자식을 번듯한 대학에 보낸 건 주변에 당신뿐이었다고. 비싼 등록금 대느라 힘들었지만, 그때는 하나도 힘든 줄 몰랐다고. 바짝 마른 아버지 두 손을 잡았다. ‘등록금이 조금 더 적은 곳으로 갔어야 했나’하는 부질없는 생각이 들었다.
차에 긁힌 상처를 보았다. 거친 손마디로 손주의 합격을 축하하며 웃으시던 아버지, 복국을 맛있게 드시던 아버지의 얼굴이 떠올랐다. 먼 훗날 나도 꿈을 이룬 아들과 함께 복국 한 그릇 먹으며 오늘을 얘기할 수 있으면 좋겠다.
조금 긁었으면 어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