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있는 시간을 곱씹으며

by 대니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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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시작점. 아니 어쩌면 삶의 방향을 온전히 결정할지도 모르는 대학시험을 무사히 마친 막내와 2박 3일 여행을 떠났다. 두 밤을 보내고 집으로 돌아오는 마지막 날 점심. 라면 한 그릇으로 때우려다 한 시간 남짓 걸리는 대기시간에 사람이 별로 없는 식당으로 들어갔다. 장어집이었다. 메뉴판을 펼쳐 들었다. 그럼 그렇지. 식당에 사람이 적은 이유는 둘 중 하나, 맛이 없든가 아니면….

수능시험 보기 전 장어덮밥을 먹고 싶다고 얘기한 녀석 눈에 장어 그림이 바로 눈에 들어왔을 것이다. 간단한 점심 한 끼로 생각하기엔 적지 않은 금액이었지만 살짝 올라간 아들의 입꼬리를 보는 것만으로도 그 값어치는 충분했다. 따뜻한 차 한 잔으로 고단함이 풀릴 즈음 아들 앞으로 짙은 양념이 밴 기름기 도는 장어덮밥이 나왔다. 고단하게 터벅터벅 걷던 녀석은 어느새 해맑은 얼굴로 맛있는 시간을 곱씹고 있었다.

내가 처음으로 먹은 장어덮밥은 이십 년 전 일본 어느 도시에서였다. 친하게 지내는 동갑내기 친구와 같이 간 학회 일정 마지막 날 장어집에 들어갔다. 지금 가격의 절반 정도였는데 당시 우리나라 식당의 밥값에 비하면 비쌌지만 둘이 맛있게 먹었다. 서로 마주 보면서 ‘정말 맛있네’란 눈빛을 교환했던 그때가 아직도 생생하다. 그날 먹었던 장어덮밥 덕분에 어렸던 아들과 함께 줄 서서 먹는 장어집에 자주 들렀었다. 민물장어와 바닷장어 두 종류를 하는 부산의 맛집이었다. 바닷가가 고향인 나는 왠지 바닷장어를 먹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바닷장어를, 가시가 많은 것을 싫어하는 아들은 민물장어를 주문했다.

그 집 장어덮밥은 맛있게 먹는 방법이 따로 있었다. 먼저 덮밥을 사 등분 하여 사분의 일은 장어와 밥만으로. 두 번째는 장어와 밥에다 고추냉이와 갖은양념을 섞어서. 또 하나는 두 번째 방법에 물을 부어 먹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앞의 세 방법 중 가장 맛있었던 방법으로 마무리하면 한 그릇을 싹 비우게 되는 그야말로 작은 장어덮밥 코스였다. 글을 쓰는 이 순간, 그 생각에 살짝 침이 고인다.

장어덮밥 가게와 집이 가까워서 주말이면 점심 첫 타임에 자주 가서 먹었었다. 아들은 그 장어덮밥을 부산을 떠나고 나서도 한 번씩 얘기했다. 어쩌다 부산에 들렀을 때도 긴 대기 줄에 포기해야 했었기에 그 맛이 더 그리웠을 것이다. 아버지 직장 따라 학교를 옮겨야 했고 가보고 싶은 맛집도 포기해야 했던 아들 녀석을 생각하면 지금도 미안하고 마음 한편이 서늘해진다. 내 인생의 세 번째 장어집에 함께 앉아 있는 아들. 친구와 함께했던 어느 장어집에서처럼 장성한 아들에게서 ‘정말 맛있네’란 눈빛을 보았다.


아버지도 장어를 좋아하셨다. 특히 아나고(뱀장어목 붕장어과에 속하는 바닷장어의 일본식 이름)를 맛있게 드셨는데 뼈째 다진 아나고 한 접시가 아버지 앞에 놓이면 아버지는 “니도 무봐라” 하시며 접시째 가운데로 밀어 놓으셨다. 고추냉이 간장에 살짝 적셔 꼭꼭 씹어 넘기면 고소하고 담백한 맛이 일품인 아나고회. 콩나물 듬뿍 넣고 푹 끓여 같이 내어 주시던 장엇국까지. 맛의 진수는 국물에 다 우러났겠지만 작은 토막 건져내어 쪽쪽 빨아 먹으면 따뜻한 아이스크림같이 녹아 없어지던 매혹적인 그 맛. 나는 아직도 아나고회와 장엇국을 좋아한다.

통영 서호시장에서 아나고를 손질해서 아버지께 자주 갔었다. 어느 날 어머니가 내 손을 잡으며 넌지시 말씀하셨다.

“너그 아버지, 이가 안 좋아서 이제 아나고 못 씹는다. 다음에는 사 오지 마라.”

팔순 지난 게 몇 해나 되었으니 그럴 만도 하다 생각되었지만, 마음 한편으로 뭔가가 썰물처럼 지나갔다. 이제 아버지는 좋아하시던 아나고회를 못 드시게 되었다. 이렇게 세월이 흘러가고 있었는데 나는 내 머리에 난 흰머리만 보고 있었다.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장어덮밥을 먹는 아들을 보며 같이 웃었다. 아들아, 아버지는 장어덮밥도 좋아하지만 아나고회도 좋아한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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