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마다 먹는 아내가 만든 LA 갈비. 고기는 찬물에 세 시간 동안 담가 핏물을 빼고 맛간장에 소갈비 양념, 후추, 마지막으로 비전의 맛을 내기 위해 배로 만든 음료수를 넣고 이틀을 재웠다고 했다. 예전에 어머니께서 맛있다고 말씀하신 이후 설이 되면 잊지 않고 LA갈비를 준비해주는 아내가 고마웠다.
벨을 눌렀다. 한 달 전, 또 일주일 전에도 그랬듯이 아들 왔다고 맨발로 달려 나와 문을 열어 주시는 어머니 손을 꼭 잡아드렸다. 드라마 대사처럼 아니면 농담같이
“엄마, 요새 손힘이 많이 약해지셨네, 우리 엄마 늙었나 보다.”라고 말하려다 말았다. 두어 달 전, 어스름한 새벽녘에 집 앞 운동장에 걸으러 나가다 넘어져 다친 이후 부쩍 노쇠해진 어머니를 보니 마음이 아팠다. 잠시 뒤 부엌에서 달달한 내음이 풍겨왔다. 입에 착착 달라붙는 달콤한 맛이 좋았다. 연신 맛있다고 말씀하시는 어머니 옆에서 아내도 웃고 있었다. 언제부터 설에 LA갈비를 먹기 시작했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생선 쪄내고 찌짐 부치고 산적 만드느라 허리 휘는 우리 집 여인네들의 아픔을 조금이라도 덜 수 있으니 그것도 좋았다. LA갈비 한 점을 집어 들어 입에 넣는 순간 어머니의 갈비탕이 떠올랐다. 두툼한 살점이 붙어 있는 갈비에 노란 계란물이 풀어진 커다란 스테인리스 냉면 그릇. 그 위로 모락모락 피어오르던 하얀 수증기가 눈앞에 어른거렸다.
어머니 나이 마흔 언저리, 작은 사업을 하셨던 아버지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였다. 음식 솜씨가 좋았던 어머니는 식당을 하기 시작하셨다. 가정식 백반에 비빔밥, 갈비탕이 주메뉴였다. 근처 관공서에 맛집으로 알려져 어머니는 바쁜 날들을 보내셨다. 학교를 마치고 와서 배고프다고 얘기하는 아들에게 어머니는 자주 갈비탕을 내어 주셨다. 계란 풀어진 국물을 몇 번 휘휘 저은 후 후루룩 마시면 알싸한 후추 향과 함께 목을 타고 넘어가는 그 맛은 기가 막혔다.
어머니는 오 년 뒤 식당을 접으셨다. 힘은 들었지만, 그때 그만두지 않고 계속했으면 하는 아쉬움을 몇 번이나 말씀하셨다. 어쨌든 어머니의 식당에서 먹던 계란 풀린 갈비탕의 기막힌 맛은 식당을 그만둔 뒤에도 지금까지 삼십 년 이상 어머니의 내음으로 마음 깊이 저장되어 있다. 대학 졸업하고 휴가 때 집에 들를 때면 어머니는 내가 좋아하던 칼국수와 갈비탕을 번갈아 해 주셨다.
어느 해부터인가 갈비탕이 식단에서 빠지더니 한참 뒤 칼국수도 식단에서 제외되었다. 힘들어서 못 하겠다고 하셨다. 음식이란 게 버튼만 누르면 나오는 자판기 콜라 같은 건 아니지만, 갈비탕 만드는 수고로움과 밀가루를 치대는 반죽에도 힘에 부치니 아들 먹이고 싶어도 어쩔 도리가 없지 않았을까?
길 가다 마주치는 식당 유리창의 갈비탕 글자만 봐도 그 시절 어머니의 갈비탕이 떠오른다. 지친 가방을 내려놓는 아들 앞에 차려낸 어머니 마음 같은 갈비탕 한 그릇. 어머니가 만들어주시던 뜨끈한 갈비탕 덕분에 힘을 내어 학창 시절을 보냈다.
세월이 흘러 그 시절 어머니보다 더 많은 나이의 중년이 되었다. 어머니도 세월과 함께 사그라지고 있다. 맛있다고 말씀하셨지만, 갈비 몇 개 드시고는 그릇을 물리는 어머니 손등에 깊이 팬 주름이 눈에 들어왔다. 아들을 위해 갈비탕을 턱턱 차려내시던 어머니의 부드러운 손에 새겨진 세월의 훈장이 보였다.
부모님 댁에 다녀와서 아내는 LA갈비를 굽기 시작했다. 주방에 서서 고기 굽는 아내의 뒷모습에서 삼십여 년 전 나를 위해 갈비탕을 끓여주시던 어머니의 뒷모습이 보였다. 며칠 뒤면 대학 기숙사에 들어가는 신입생 아들은 갈비탕 먹던 나처럼, 엄마의 LA갈비를 맛있게 먹었다. 세월이 또 흐른 뒤, 나이 든 제 엄마한테 LA갈비 해달라고 조를 아들 녀석 생각에 마음 한편이 아려왔다. 그때도 나는 어머니의 따뜻한 갈비탕을 먹고 싶을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