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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대니보이 Oct 02. 2023

역사에 만약이란 것이 있다면

청일조계지 경계계단에서

   인천 차이나타운을 걸었다. 네이버 별점 좋은 식당에서 자장면, 중국냉면, 탕수육으로 이른 점심을 먹고 구한말 역사의 현장으로 걸음을 옮겼다. 10분쯤 걸었더니 항구가 보이는 돌계단에 닿았다. ‘청일조계지 경계계단’ 이 팻말을 중심으로 한쪽은 일본, 반대쪽은 청나라 조계지로 나뉘었다. 조계지는 조약에 따라 상대방 국민의 거주와 영업 등을 허가한 지역을 말한다.

   1876년, 일본의 치외법권을 인정한다는 내용들을 포함한 강화도조약이 체결되었다. 이 조약을 근거로 6년 뒤인 1883년 제물포, 즉 인천이 개항되었다. 계단 초입에 서서 좌우를 둘러보았다. 오른쪽은 청나라 다른 쪽은 일본 조계지였던 두 장소. 확연히 차이 나는 풍경에 색다르기도 했지만, 국제 정세를 파악하지 못해 힘없는 나라로 전락하여 열강들에 땅덩어리를 쪼개줘야 했던 역사적 비극에 마음이 아렸다. 구한말 격변의 시기, 보이지 않는 선 하나에 갈라진 흑백의 풍경을 돌아보며 보고 또 봤던 오래전 영화 한 편이 떠올랐다. 

   1972년 개봉한 영화 <정무문>. 시대를 뛰어넘어 여전히 무술영화의 아이콘인 이소룡이 출연한 이 영화는 1937년 일본이 점령한 상해를 배경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이 영화에서 이소룡이 ‘동아병부(東亞病夫, 중국이 동아시아의 병자라는 뜻)’라고 적힌 현판을 발차기로 박살 내는 데 꽤 인상적인 장면이었다. 

   하지만 이보다 인상적인 장면은 따로 있었다. 이소룡이 일본 조계지 공원에 들어가려고 하자 경비원에게 제지당하는데 그 옆으로 외국인 여성이 개를 데리고 공원에 들어가는 장면이 나온다. 항의하는 이소룡의 시선 끝에 ‘개와 중국인 출입 금지’ 라고 쓰인 영어 팻말이 보인다. 이소룡은 일본인들과 싸웠고 지켜보던 공원 밖 주변인들이 그에게 박수 보내는 것으로 장면이 마무리되는데 여전히 생생하게 기억에 남아있다. 

   1853년 일본은 미국의 페리 제독에 의해 개항되어 근대화의 물결에 올라탔다. 그로부터 20여 년 뒤인 1875년, 일본은 조선 해안을 탐침 한다는 핑계로 운요호를 강화 앞바다로 보냈다. 조선 수군의 방어적 공격에 운요호는 함포 공격 후 현재의 인천 영종도에 상륙하게 된다. 이 사건을 계기로 이듬해 조계지를 인정하는 강화도조약이 체결된 것이다. 이후 조선은 허울뿐인 황제의 나라 대한제국이 되었고 그로부터 13년 뒤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으며 조선 백성들은 고단한 삶을 살게 되었다. 

   일본 조계지였던 골목으로 들어섰다. 골목 초입에 들어서자마자 고풍스러운 건물이 보였다. 대불호텔. 우리나라 최초의 호텔을 재현해 놓은 것이다. 인천이 개항되자 일본해운업자가 세운 호텔로 아펜젤러, 언더우드 선교사의 회고록에도 등장한다. 대불호텔은 비싼 가격에도 호황을 누렸다. 당시 인천에서 서울까지 우마차로 열두 시간이 걸렸기에 인천으로 들어오는 외국인에게 숙박은 필수였다. 하지만 영화의 시간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1899년 경인선이 개통되어 인천에서 노량진까지 한 시간 사십 분이면 갈 수 있게 되었고 그때부터 대불호텔은 쇠락하였다. 

   화려했던 대불호텔도 세계 정세의 흐름을 타지 못해 몰락한 조선왕조처럼 찰나의 영화에 앞을 보지 못해 한 줄 기록으로만 남게 되었다. 혼돈의 구한말 밝은 눈을 가진 지도자가 있었다면. 아니 그 이전 붕당정치와 세도 정치로 나라가 망가질 때 눈 뜬 이가 있었다면. 아니면 임진왜란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하나. 

   주역에 ‘천행건, 군자이자강불식(天行健, 君子以自不息)’ 이란 구절이 나온다. 하늘의 운행은 건장하니 군자는 그것을 본받아 스스로 강건하여 쉼이 없어야 한다는 뜻이다. 자강불식(自不息). 쉼 없이 단련하고 애써야만 지키고자 하는 것을 지키고 얻고자 하는 것을 얻을 수 있는 것이 개인의 삶일 것이다. 그것이 확장되면 사회와 국가일 것이다. 

   역사에 만약이란 것이 있다면 어땠을까 생각해 본다. 1583년 선조 16년, 율곡 이이의 십만양병설이 받아들여져 조선이 ‘자강불식’ 하여 북으로 여진족, 남으로 일본의 침략을 대비했더라면…. 가정이 없는 것이 역사이지만 청일조계지 경계에서 바라보는 사뭇 다른 두 거리의 풍경에 아쉬운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이제 와 어쩔 수 없는 아쉬움 아닌가. 백이십 년의 시간을 빠져나와 다시, 다음 목적지로 발길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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