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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대니보이 Dec 25. 2023

유통기한 없는 마음

   수면 장애에 위장 기능이 좋지 않은 아버지와 함께 대학병원 소화기 내과에 다녀왔다. 진료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아버지는 고달팠던 시절 이야기를 하셨다. 건축일을 하셨던 아버지는 돈이 있을 땐 문제 없었지만, 공사 몇 개를 동시에 할 때면 여기저기 빚을 얻어야 했다. 서울에서 학비가 가장 비싼 대학에 다니는 아들 등록금에 용돈 날짜까지 겹치면 빚을 더해야 했다는 말씀에 마음 한편이 아렸다. 나 또한 아이들이 자라 대학에 가고 나서야 알게 된 마음이기에 “아버지 고생하셨습니다.”란 말씀밖에 할 수 없었다. 세월과 함께 노쇠해진 아버지는 그 한마디에 살며시 웃으셨다. 

   어느새 도착한 본가. ‘아범, 건강이 최고다. 운전 조심해라’라고 당부하시며 손 흔들고 집으로 들어가시는 아버지. 삼십 년 전 아버지는 지금 내 나이쯤이었을 것이다. 무척이나 단단하고 커 보였던 아버지였는데, 그 시절보다 훨씬 가냘프고 작아진 뒷모습에 또 마음이 시렸다. 손 흔드는 아버지께 같이 손 흔들고 삼십 분을 달려 집에 도착했다. 

   갑자기 추워진 날씨에 따듯하고 얼큰한 라면 한 그릇이 생각나 주차장에 차를 세워 두고 집 앞 마트로 갔다. 판매대 한 면을 가득 채운 산더미 같은 총천연색 라면. 배고픈 시선으로 쫓아가다 멈칫했다. 라면 봉지에 유쾌하게 웃는 소를 레트로 풍으로 그려 넣은 소고기 라면이 눈에 들어왔다. 그때와 똑같진 않았지만 삼십 년 전 대학 시절, 자취할 때 먹었던 라면과 아주 비슷했다.

   학생회관 지하 1층, 지금은 없어진 한일은행 ATM기에서 잔액을 조회했더니 쓸 수 있는 돈이 얼마 없었다. 만 원을 뽑아 자취 집 앞 마트에 갔다. 필요한 물품 몇 개 사고 남은 돈 삼천 원. 일주 뒤 용돈이 들어올 때까지 버텨야 했기에 마트를 찬찬히 둘러보았다. 하지만 아무리 둘러봐도 며칠 버텨낼 수 있는 먹거리는 눈에 띄지 않았다. 두어 바퀴 다시 돌아보는데 마트 귀퉁이에서 열 개입 한 묶음에 가격 천 원인 라면을 발견했다. 소 한 마리 살짝 발 담그고 지나갔을 법한 맛을 가진 라면. 어렵게 보내온 용돈을 무계획적으로 사용한 대가로 일주일을 그 라면으로 버텨야 했다. 


   아내는 파를 듬뿍 넣고 달걀도 두 개 풀어 따뜻한 김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소고기 라면을 맛있게 끓였다. 젓가락 끝에 매달려 올라온 라면 가락들을 후루룩 삼킨 뒤 어머니가 보내 주신 아삭아삭한 무김치를 베어 먹었다. 배고팠던 청춘의 그 시절도 좋았지만, 행복한 내음으로 가득한 이 공간 또한 감사하다. 

   소고기 맛 그득 배부른 시간을 보내고 일요일 교회에서 받아온 목록과 목록에 있는 물건들을 거실 바닥에 늘어놓았다. 해마다 연말이면 교회에서 생활필수품을 상자에 넣어 전달하는 행사를 하고 있다. 현금으로 기부 해오다 올해는 상자에 물품을 채우기로 했다. 목록과 찍어온 사진을 맞춰가며 상자를 채워나갔다. 3분 요리 두 개, 곰탕 국물 세 봉지, 간장, 식용유, 라면 다섯 개입 한 묶음. 몇 달 보낼 수 있는 양은 아니지만, 상자에 담아 보낸 마음만은 한겨울 추위를 조금이라도 덜어주었으면…. 

   기프트 박스에 어느 정도 물건을 채우고 나서 목록을 다시 확인했다. 목록 아래쪽에 ‘유통기한이 3개월 이상 남은 것’으로 준비해달라는 안내 문구가 적혀 있었다. 먹거리 제품의 뒷면을 얼른 살펴봤다. 다행히 유통기한이 1년 이상 남아있었다. 휴, 안도의 숨 한번 길게 쉬고 상자 안에 가득 담긴 마음을 돌아보다 차 안에서 아버지가 하셨던 말씀들이 가슴 밑바닥에서 올라왔다. 

   아버지는 흰 머리카락 드문드문한 나이 든 아들 걱정을 오십 년 넘게 하고 계셨다. 나는 젊었던 아버지가 보내 주신 용돈 허투루 사용하다 허기진 배 채워주었던 소고기 라면을 삼십 년이나 잊지 않고 있었다.

   오늘 내가 포장한 이 라면과 작은 음식들도 어쩌면 누군가에게는 오래도록 기억되는 무엇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DNA로 연결된 끈끈한 핏줄뿐만 아니라 타인의 결핍을 채워주는 사람의 향기는 ‘유통기한’ 없이 오래 지속되는 것임을 알기에. 

   천천히 그리고 꼼꼼히 상자를 갈무리하고 뚜껑을 닫았다. 유통기한 없는 마음도 함께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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