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아, 널 기다리느라 뜬 눈으로 보낸 밤이 생각난다.
그날도 그저 그런 겨울날이었다.
토요일, 바쁜 사람들은 종일 진료실 문을 쉼 없이 번갈아 여닫으며 거친 발걸음으로 뛰어나갔다. 온전한 대답 기다리지도 않은 숱한 질문들만 문 앞에 쌓였다.
발치에 매달린 무겁고 더딘 시간 밀쳐 내고 서둘러 집으로 돌아갔다. 묻어온 시간의 자투리 탈탈 털어내고 소파에 앉아 너를 기다렸다.
전기 주전자 폴폴 끓은 뜨거운 물, 드립 주전자에 옮겨 담았다. 아프리카 어디쯤서 건너온 ‘에티오피아 시다모’ 커피는 제 온 곳으로 가려는지 고소한 초콜릿 향 머금고 온 방을 헤매고 있었다. 입 안 가득 채운 아프리카 향내에 나도 따라 그곳으로 가고팠지만 가버릴 너를 기다려야 했기에 공중에 뜬 발가락 가라앉혔다.
연아, 오늘 하루도 고달픔 많았다. 감당할 수 없는 찰나 가득한 하루. 떨쳐낼 수 없는 날을 그렇게 지나왔다. 일 년 전 또 그전에도 버거움 한가운데 앉아 눈물 한 방울로 견딜 수 없는 무게를 흘려보냈었다.
‘눈 깜짝할 새 지나가 버리는 시간에 쫓겨 우리는 좀처럼 숨 돌릴 여유조차 가질 수 없다. 시간은 교도관처럼 우리 등 뒤에서 회초리를 들고 감시한다.’
_ 쇼펜하우어
피할 수 없는 회초리 온몸으로 맞아내며 아직 오지 않은 너를 기다리는 고요한 이 밤.
연아, 창문을 열었다. 차가운 밤공기 훅, 폐 안으로 밀려왔다. 놀라 문을 닫으려는 그 순간 어디선가 종 울음소리 달려왔다. 천둥 같은 종소리에 넋 놓고 있었다. 그때였다. 언제 왔었는지 모를 너는 서둘러 창문 너머로 사라졌다.
아쉬워 두 손 내밀다 접고 말았다. 채찍이 무서워서는 아니었다.
내게는 떠나버린 연아, 구년(舊年)보다 지금 내 곁에 온 신년(新年)이 더 소중하기에….
연아, 연아 너는 내게 시간의 채찍 비껴갈 수 있는 지혜 하나쯤 붙여 다오.
잘 가거라 연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