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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대니보이 Jan 08. 2024

딸 몰래 흘리는 눈물

   이번이 몇 번째 생일인지. 카운트 안 한 지도 오래됐다. 큰아이는 ‘깨톡’으로 생일 선물을 보냈다. 포장지를 개봉하는 가슴 설레는 손맛은 없어도, 우편번호 검색해서 맞는 주소 클릭한 뒤 동 호수 적는 순간순간마다 아버지에게 전하고픈 따뜻한 마음 씀씀이가 느껴져 너무나 고마웠다.

   큰아이는 1,880그램으로 태어났다. 이제는 탈피를 몇 번이나 했는지 모를 정도로 어릴 적 모습과 크기는 상상조차 하기 힘든 다 큰 자식 생각에 눈물이 날 뻔했다. 삭풍 한설 서울 날씨에 뽐낸다고 맨살 드러내고 다니지 않을까 걱정되긴 하지만 어쩌랴, 다 큰 자식을. 몇 날을 기다려 포장된 상자를 받았다. 내용물은 이미 이미지로 보았으나 그래도 언박싱은 언제나 고요한 심장을 살짝이라도 움직이게 하는 무엇이 있다. 종이상자와 포장지를 벗겨 냈더니 ‘그 물건’이 나왔다. 

   도니체티의 오페라 ‘사랑의 묘약’의 주인공인 어수룩한 시골 총각 네모리노. 그가 사랑을 얻기 위해 떠돌이 약장수 ‘둘카마라’에게 속아서 마신 사랑의 묘약이 생각났다. 싸구려 포도주인 그것이 약효가 있을 리 없었다. 하지만 그 약 덕분에 짝사랑하던 ‘아디나’가 자신에게 호감을 느끼게 되었다고 착각하며 부르는 유명한 아리아 ‘남몰래 흐르는 눈물(Una furtiva lagrima)’도 생각났다. 내가 ‘파’ 선생님이라 부르는 이제는 고인이 된 파바로티의 순박하고도 애절한 그 노래를 얼마나 듣고 또 들었던지. 

   마법이 담겼을 법한 오묘한 색깔의 초록 병이 상자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아기 예수의 탄생 때 동방박사의 선물 중 하나인 몰약이라고 하면 돌 맞으려나? 어쨌든 이것 하나면 여러 가지 바르지 않아도 되는 화장품이었다. All-in-one! 쓴맛과 좋은 향을 띈 적갈색의 물체. 의학적으로는 염증 치료나 방부제로 사용되었고 에센셜 오일의 여왕이었다고 하는 몰약. 큰아이가 보내준 그것은 몰약이라고 해도 전혀 문제 될 것이 없었다. 

   빙그르르 뚜껑을 돌려 열고서 손바닥에 탁탁 두드렸다. 적당량을 얹고 두 손을 비빈 뒤 낡은 얼굴에 문질렀다. 시원한 박하 향이 오래된 얼굴에 닿는 순간 기분이 좋아졌다. 좋아진 기분만큼 얼굴도 팽팽해졌다. ‘음 하하하’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자식 키운 보람 있네.

   그렇게 하루 이틀이 지나고 닷새가 되었다. 좁은 공간에서 아픈 아이들을 진료하기 때문에 늘 잔병을 달고 산다. 그래서 얼굴이 조금 퉁퉁해지고 걸을 때마다 몸이 공중에 조금 떠 있는 느낌이 들어도 그러려니 했다. 하루 더 지났더니 온몸에 얇은 막이 쌓여 세상의 소리나 색깔이 필터를 통해 전달되는 느낌이 들었다. ‘뇌(Brain)에 문제가 생겼나?’ 문득, 증상이 시작된 날을 되짚었다. 그랬다. 그날이었다. 마법의 초록병, 몰약이라 생각하며 아침저녁으로 얼굴에 바르기 시작한 그날부터였다. 

   미국 FDA 자료에 천연고무, 향수(향료), 방부제, 염료, 금속 등 다섯 가지 종류가 화장품과 관련하여 알레르기를 일으킬 수 있다고 자세히 명시되어 있었다. 우선 화장품을 바르지 않고 증상을 빨리 가라앉히기 위해 스테로이드 주사를 맞았다. 다행히 그다음 날부터 얼굴과 몸에 쓰여 있던 막 같은 느낌이 사라지고 조금 떠 있는 듯한 느낌의 발걸음도 땅에 닿았다. 다행이다. 이게 원인이 아니었다면 머리 MRI 검사에다 유난을 떨어야 했을 것이니. 


   가짜 사랑의 묘약을 마시고 유포릭(euphoric) 해진 네모리노처럼, 큰아이의 몰약 같은 선물을 받고 공중에 붕 떠다닌 며칠이었다. 일주일 동안 몽환에 살게 한 그 초록 병은 휴지통으로 가버렸고 딸 아이는 아직 이 사실을 모른다. 아무렴 어쩌랴. 덕분에 깨톡으로 선물 받는 신문물을 접하고, 일주일 동안 매일 알레르기 유발 물질을 바른 뒤 몽롱함에도 빠져 봤으니. 아무런 후유증 남기지 않고 돌아온 일상에 감사하다.

   전화 진동음이 울렸다. 사랑의 묘약 같은 몰약을 건네준 딸이었다. 

   “아빠, 저 합격했어요!” 

   원하던 회사에 합격했다는 소식이었다. 아이의 만화 같은 목소리에 기쁜 선물에도 흐르지 않았던 눈물이 흘렀다. 알레르기로 고생은 했지만, 몰약 담긴 초록 병이 정말 동방박사의 선물이었거나 둘카마라가 깜빡하고 네모리노에게 잘못 건네준 ‘진짜’ 사랑의 묘약이었나 보다.

https://www.youtube.com/watch?v=YOA0mxmSfsM&list=RDYOA0mxmSfsM&start_radio=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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