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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대니보이 Jan 15. 2024

크리스마스 기적에 실려 온
냉면 한 그릇

   

   시월이 오기 전에 아쉬움부터 먼저 온다. 

   찌그러진 노란 주전자에 뜨겁지만 시원한 비전의 맛이 들어간 육수가 나오면 스테인리스 이중 컵에 붓는다. 후~후 불어 마시다가 적당하게 배합된 냉면과 가오리무침 그리고 계란이 얹힌 함흥냉면 그릇을 지긋이 내려보고는 한 젓가락 가득 면발을 감아올려 입안에 채워 넣는다. 알싸한 매운맛이 입안 점막에 달라붙어 세포 하나하나를 톡톡 건드리다 면발이 목구멍으로 넘어갈 때 같이 가서 식도를 두드리고는 희미해져 간다.

   냉면을 주문하면 삶은 계란 반 개가 올라오는데 언제부터인가 나의 냉면 그릇에는 계란 한 알이 담겨 오기 시작하였다. 물론 이천 원 더 받는 곱빼기보다 많은 면발도 함께 말이다. 우연히 알게 되어 오 년 넘게 다니고 있는 함흥냉면 집. 처음엔 그냥 맛있는 냉면 가게이겠거니 하고 들렀다가 돌아서면 머릿속에 맴도는 인생 맛집이 되어버렸다. 일제 강점기에 지어진 이 층 적산가옥으로, 들어서면 좁은 통로마다 방이 칸칸이 붙어 있고 복도 중간쯤 나무로 된 가파른 계단을 올라가면 시간 여행자가 된 듯한 공간이 펼쳐진다. 다다미 바닥에 테이블 몇 개가 줄 맞춰 앉아 있고 개방된 창문으로 장승포항이 내다보이는 곳.

   

   육이오 전쟁 초기 흥남 부두는 남한으로 피난 가기 위해 모인 인파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마음씨 좋은 냉면집 사장님의 할머니도 그곳에서 배를 탔다. 정원 육십 명인 상선 ‘메러디스 빅토리’ 호에 일만 사천 명이 탑승했고 배 안에서 태어난 다섯 아이까지 포함하여 다친 사람 하나 없이 크리스마스 날 거제 장승포 앞바다에 도착하였다. 그때 배 안에서 태어난 아이들에게는 '김치 1'부터 '김치 5'까지 애칭이 붙여졌고 지금도 크리스마스의 기적이라고 부르고 있다. 고단한 피난살이에 냉면집을 시작했고 그것이 삼대째 이어진 것이다. 

   그런데 그 유혹적인 냉면의 맛은 삼월부터 시월까지만 맛볼 수가 있다. 왜 그러시냐 여쭤보았더니 일제시대에 지어진 집이라 난방이 되지 않아 넉 달 동안 문을 닫는다고 하셨다. 가을부터 거세지는 바닷바람에 난방이 되지 않는 오래된 일본식 가옥은 나이 들어가는 집주인이나 다다미에 앉은 손님을 힘들게 한다. 그래서 시월이 시작되면 아쉬운 입맛을 다시며 몇 번이나 찾아간다. 오늘이 그날이다. 오늘 문을 닫으면 다음 해 삼월에야 다시 연다. 그때까지는 냉면을 먹을 수 없다. 기다려야 하는 아쉬움에 다른 냉면집을 찾아봐도 그 냉면에 길든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You risk tears if you let yourself be tamed’ 누군가에게 길들여진다는 것은 눈물 흘릴 일이 생길 수도 있다는 것이다.

   냉면 면발 하나에 눈물까지 흘리겠냐마는, 시월이 가까워져 올수록 아쉬움이 쌓여갔다. 언제 먹으러 가야 하나? 내년까지 어떻게 기다려야 할까? 새벽에 잠이 깨면 그 집 냉면 맛이 생각났다. 서울 살던 시절에 맛본 오장동 냉면은 이미 마음을 벗어난 지 오래. 나에게는 오로지 그 집 냉면만이 냉면이 되었다. 

   오늘이 지나면 백일도 더 지나야 그 냉면을 맛볼 수 있다. 퇴근 시간이 다가올수록 초조해졌다. 여섯 시까지 할 때도, 일곱 시까지 할 때도 있는데 오늘은 몇 시에 문 닫을지 알 수 없으니. 전화를 걸었다. ‘뚜-뚜-’ 짧은 신호 뒤에 달칵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 네 사장님. 용과입니다. 오늘 몇 시에 문 닫으시는지요?” 

   “여섯 시 문 닫습니다만, 기다릴 테니 천천히 오세요.” 

   고맙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한 대답이 돌아왔다. 서둘러 병원을 나섰다. 가는 길에 과일가게에 들러 단감 한 상자를 실었다. 마음이 조금 편안해졌다. 이십여 분 달려 도착한 그 집 앞. 늘 환하게 켜져 있던 간판 불빛이 어둡게 꺼져 있었다. 덜컹하는 마음으로 가게 입구를 봤더니 문 앞에서 내외분이 밝게 웃고 서 계셨다. 서둘러 단감 상자를 내려놓고 기다리게 해서 죄송하단 말과 함께 인사드렸다. 

   “괜찮아요, 어서 와요.” 

   웃으면서 말씀하시는 사모님께 꾸벅 인사하고 일 층 방에 앉았다. 계피 향 섞인 뜨끈한 육수를 한 모금 삼키니 허기가 밀려왔다. 배배 꼬고 앉은 짙은 회갈색 면 다발 위에 삭힌 가오리 몇 점, 편육 하나, 삶은 달걀 반 개가 정갈하게 담겨 있었다. 

   “오늘은 달걀이 다 떨어져 반 개만 올렸어요.” 

   “괜찮습니다. 감사합니다.” 

   젓가락 가득 면발을 감아올려 한입에 가져갔다. 오독오독 씹히는 가오리 회무침과 쫄깃하고도 알싸한 면발 가닥이 입안 점막 가득 찼다. 아껴서 꼭꼭 씹고, 삼키고, 뜨끈한 육수 마시고. 올해 마지막 냉면 한 그릇이 바닥을 보일 때쯤에야 정신이 들었다. 

   ‘이런, 너무 빨리 먹었군.’ 

   한 그릇 더 먹을 수도 없는 노릇이니 남은 면발 몇 가닥과 가오리 회무침 한 점, 빨간 양념 담긴 그릇에 차가운 육수를 부었다. 젓가락으로 휘휘 저었다. 한 젓가락 집어 들고서 후루룩 씹고 마시고 했더니, 끝이다. 올해 마지막 냉면이다. 입안 가득하다 스르르 사라진 냉면 면발… 또르르, 오른쪽 눈가에 물기가 흘렀다. 

   “올 한해도 맛있게 잘 먹었습니다. 건강히 지내시고 내년에 뵙겠습니다.” 

   아쉬운 걸음으로 나서니 올해도 어김없이 검은 봉지 주섬주섬 건네신다. 서울 가는 자식 챙겨 주시는 것처럼 시원한 육수 몇 통과 가오리회 무침을 쥐여주며 내년에 보자고 말씀해 주신다. 

   칠순이 얼마 남지 않은 멋진 냉면집 주인께 인사하고 돌아섰다. 불 꺼진 간판이 눈에 가득 찼다. 잊히지 않는 그 무엇이 되고 싶단 생각, 누군가가 돌아볼 수 있는 그리운 무엇이 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가 훅 사라졌다. 흔적을 남겨 어디에 쓰려고. 

   크리스마스 기적에 실려 온 냉면 한 그릇. 삼월이 벌써 그립다.


*예전에 썼던 냉면 이야기 두 편을 엮었습니다. 빨리 3월이 오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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