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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대니보이 Jan 22. 2024

서로 곁에 있어 더 좋은 오늘

   힘없이 누워 있는 아내 앞에 포장해 온 죽을 펼쳐 놓았다. 선명한 흰죽 한 숟갈에 동치미 국물 들이켜는 아내는 배탈이 심한 상태였다. 첨가물 하나 없는 하얀 죽 그릇 위로 어른거리는 파리한 아내의 창백한 얼굴. 마음이 아렸다. 겨울 굴이 제철이라며 남편이 좋아하는 굴 떡국을 만들다 먹은 생굴 때문일까? 밤새 끙끙 앓았던 아내에게 몹시 아프면 입원하자고 말하곤 출근길을 나섰다.

   아침나절 병원문 열자마자 기다리고 있던 아픈 아이들을 순서대로 진찰하고 한숨 돌리던 순간, 책상 아래 진동음이 울렸다. 진료 시간엔 웬만해선 전화하지 않는 아내였다. 

   “여보…” 

   힘없는 아내의 목소리에 가슴이 철렁했다. 아이 셋 낳을 동안에도 아파서 병원 가야겠다고 한 적 없던 아내가 입원해야겠다고 했다. 병원 검사실 앞 의자에 눕듯이 걸터앉은 작은 여인의 두 손을 잡고 병실로 올라갔다. 기력 없이 누워 실눈 뜨고 손 흔들어 주는 아내를 남겨 놓고 기다리고 있을 아이들을 진찰하기 위해 진료실로 내려갔다. 

   컴퓨터 화면에 뜬 아픈 아내 이름 석 자. 심한 장염 때문에 아무것도 먹지 못한 채 늘어져 있던 아내가 어른거렸다. 포도당에 나트륨이 포함된 수액을 처방하고 복통과 설사를 가라앉힐 그야말로 묘약을 타이핑해 넣었다. 코 골며 잠자고 있는 남편 곁에서 밤새 끙끙 앓았을 아내를 위해 기도하는 마음도 같이 섞었다. 

   오전 진료를 마치고 서둘러 병실로 올라갔다. 병실 문을 살짝 열었더니 귀여운 아내가 맥없이 웃고 있었다. TV 아래 놓인 식판에 놓인 그릇 세 개. 흰죽 한 그릇, 동치미 조금, 간장 조금 담긴 종지. 배 아픈 아내는 그것도 소화가 안 된다며 손도 대지 않고 있었다. 하기야 내가 병실로 올라오기 전 아내는 복통 때문에 주사까지 맞았으니 멀건 죽 한 그릇 넘기기 힘들었을 것이다. 힘없이 누운 아내의 흰 손을 꼭 잡았다. 졸린 건지 기운이 없는 건지 아내는 이내 잠이 들었다. 나도 같이 잠시 누웠더니 어느새 오후 두 시. 잠든 아내를 남겨 두고 진료실로 돌아갔다. 또다시 바쁜 시간을 보낸 뒤 아내가 있는 병실로 올라갔다. 

   그렇게 두 밤을 아내와 작은 병실에서 같이 보냈다. 밤새 복통 때문에 몇 번이나 주사를 맞은 아내는 밤낮이 바뀌었다. 나도 따라 선잠 자며 아내를 간병했다. 아내는 배 아픈 것이 좋아지기도 했지만, 이틀 동안 감지 못한 머리가 찝찝해서 퇴원하겠다고 했다. 하루 더 있자고 했지만, 결국엔 내가 퇴근할 때 함께 집으로 돌아왔다. 


   휴, 집에 왔다. 얼마 만에 맡는 집 냄새인지. 익숙한 xx 문고 내음에 찌뿌둥했던 온몸이 녹아내렸다. 뒤에 서 있던 아내는 아직 기력이 돌아오질 않아 희미한 발걸음으로 따라 들어와서는 깔려 있던 이부자리에 누웠다. 이박 삼일의 요양에 전부 회복되진 않았지만 그래도 작은 병실을 벗어난 홀가분함이란.

   “당신이 간병 잘해줘서 빨리 나았어요.”

   아내는 말끝을 흐렸다. ‘나는 보살펴 줄 남편이라도 있지만, 타지에 생활하는 자식들은 아프면 혼자서 얼마나 힘들까.’ 내 귀까지 들려온 아내의 혼잣말에 마음이 짠했다.

   자식 생각하는 엄마의 마음이란 다 같은 걸까. 얼마 전 본가에 갔을 때였다. 이런저런 얘기 끝에 팔순이 다 돼가는 어머니는 아내에게 농담처럼 “니도 니 자식이 제일 좋제, 나도 내 자식이 제일 이쁘다.”라며 오십 넘은 자식 손을 잡았다. 아내도 누군가의 딸인데, 그 딸을 제일 귀히 여길 아내의 엄마는 머나먼 서울에서 연로한 몸으로 겨울을 보내고 있으니 내가 그 노릇을 할 수밖에. 

   오분도미와 귀리 섞인 밥냄새가 부엌을 채우기 시작했다. 아픈 몸에도 남편 밥 해먹인다고 아내가 앉혀 놓은 밥이었다. 일어나려는 아내를 이부자리에 눕히고는 부엌으로 가서 전기밥솥을 열었다. 주걱으로 이리저리 뒤적거리며 고소한 밥을 잘 섞었다. 싱크대 아래 작은 냄비를 꺼내 밥 한 주걱 담고 정수기 물을 자박자박 채웠다. 가스레인지에 냄비를 올린 뒤 가스 불을 켰다. 얼마 지나지 않아 냄비는 구수한 누룽지 향을 보글보글 끓여내기 시작했다. 중불로 줄인 뒤 나무 숟가락으로 냄비 바닥을 이 삼 분 천천히 젓다가 가스 불을 껐다. 드디어 완성된 아내를 위한 부드러운 죽 한 그릇. 죽그릇을 소반에 담아내어 갔다.

   죽 한 숟갈 천천히 넘기는 아내. 그러고 보니 결혼 생활 동안 아내를 위해 무언가를 만들어낸 건 오늘이 처음이었다.

   내 자식이 제일 이쁘다 할 엄마도 곁에 없고 내 아들딸이 제일 좋다 하며 토닥거릴 자식들도 집을 떠나버린 지금, 허전함과 그리움 한껏 품고 있다 덜컥 병에 걸린 아내는 서투르게 차려진 죽 한 그릇에 눈물 찔끔 흘렸다.

   아프지 말고 건강히 나이 들어갑시다. 마음대로 될 리 없는 어설픈 약속인 줄 알지만 그래도 서로 곁에 있어서 더 좋은 오늘 저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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